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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성경의 정의와 심판
bar.gif유학생 시절에 맨해튼에 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함께 간 장로님께서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몇 년 전까지 한국인 상점들이 넘쳐나던 거리에 지금은 중국 상점들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연유를 물었습니다. 맨해튼 땅값이 워낙 비싸서 한국인들은 장사할 장소를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월세를 내어가며 장사를 한 반면 중국인들은 건물을 사서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월세가 천정부지로 뛰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우리 교포들에게는 재앙인 그 상황이 중국인들에게는 부를 안겨주었고 그들은 그 부를 바탕으로 한국인 상권을 순식간에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이 부자여서 건물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은 계(契)를 만들어서 건물을 샀다고 합니다. 우리 교포들은 왜 계를 만들 수 없었을까요? 중국인 사회에서 계를 떼먹은 배신자는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심판을 피할 수 없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배신하고도 심판을 피하여 살아남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랍니다. 심판이 없고 정의가 시행되지 않으니 계를 만들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장로님의 탄식 섞인 설명이었습니다. 
 

 장로님 말씀만으로 교포사회를 판단할 수 없고 상황을 다 설명할 수도 없지만, 악한 일에 대한 심판과 억울함을 풀어주는 정의가 건강하고 발전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임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악한 행위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 억울함을 풀어주는 정의가 실종된 사회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망하기 마련입니다. 공동체의 윤리와 흥망성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가치가 바로 정의인 것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만 아는 분들은 정의와 사랑을 대립하는 가치 혹은 경중이 다른 가치로 알고 정의를 사랑보다 하위의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정이나 친구모임과 같은 사적 공동체에서는 정의보다 사랑을 우선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 군대, 회사, 국가와 같은 공적 공동체의 윤리를 말할 때는 사랑보다 정의가 중요해 집니다. 정의와 사랑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것은 배경이 되는 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지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항상 앞선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 7:11)

 

 구약성경은 정의와 심판을 강조합니다. 구약성경이 전하는 복음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배경으로 삼아서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고난공동체로 그 역사를 시작한다는 말씀을 지난번 글에서 한 바 있는데, 고난공동체 이스라엘에게 정의와 심판은 불편하거나 부정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분노하시면서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의로움의 상징이고 소망과 기쁨의 근원이셨습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인간이되 인간답게 대접받지 못하며 서글픔과 억울함을 경험하며 산 옛적을 기억하며 읽으면 정의와 심판이 소망과 기쁨으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20세기의 지성 C. S. 루이스라는 분은 <시편사색>이라는 저서에서 이 같은 내용을 민사소송과 형사재판의 비유로 설명해 줍니다. 신약성경이 다루는 심판의 본문에서 모든 인간은 형사재판의 피고로 등장하는 반면, 구약성경이 다루는 심판의 본문에서 재판정에 선 주인공격의 사람은 민사소송의 원고 자격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그 요지입니다. 형사재판의 피고가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은 무죄판결입니다. 신약의 심판은 그러니 두렵고 불편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민사소송의 원고는 무죄판결이 아닌 권리의 회복을 기대하며 법정으로 갑니다. 그에게 법정은 두려움의 장소가 아니라 소망의 장소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정죄의 개념으로 심판을 이해하기에 심판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갖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수천 년의 세월에 걸친 절대다수 인류의 경험을 기억하며 볼 때 구약성경의 심판은 정녕 많은 경우에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권리회복의 기회요, 소망과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2. 구약성경의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파하시는 하나님
bar.gif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다양한 민족적 배경과 인종적 배경을 가진 고난의 사람들을 모아 이루신 공동체라고 지난번 글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다양한 민족적-인종적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그들의 지난 과거를 다 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탄생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미국에 앞선 원조 ‘멜팅 팥 melting pot'이라는 말씀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질문은, 무엇이 그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이스라엘의 백성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담긴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 그 포기할 수 없는 소망이 고난과 환난 중에 있던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고 더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피차의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비밀 아닌 비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선포된 하나님 말씀, 특별히 정의와 심판에 관한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 곧 ‘멜팅 팥’으로서의 이스라엘에 관한 이해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준 하나님나라 비전에 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고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준 것은 왕이나 제사장 같은 소수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귀하게 대접받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돕는 ‘정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가 무너질 때마다 시편기자들은 하나님께 호소했고 선지자들은 정의의 실천을 지도자들에게 강력히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 더 알아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사는 일에 실패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하시는 노여움의 언어, 심판의 언어에 관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과 노여움의 언어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심판의 언어를 두려움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을 예로 들어 간략히 설명해 봅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 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호 2:14~15)

 

 ‘그러므로’는 인과관계 접속사인데, 지면관계로 소개를 생략한 앞 단락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떠난 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의 음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 ‘그러므로’에 이어 나오는 말씀은 심판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위로하시겠다는 말씀, 포도원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말씀, 아골 골짜기를 리모델링해 소망의 문을 만들어주시겠다는 말씀 등은 구애의 언어이지 심판의 언어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거친 들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구애를 하시겠다고 하시는데, 그 거친 들이 추억의 장소인 것이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첫사랑을 회복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 것입니다.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는 말에서 그 마음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 뒤에서 보는 것은 이스라엘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아파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의 언어, 심판의 말씀에서 성도는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3. 구약성경과 ‘오직 주님’
bar.gif 아파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프실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아프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아픔 속에서 만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뵈었을 때 하나님은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나타나셨는데, 유대인의 해석전통은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을 끝없는 고통으로 이해합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지옥의 고통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애굽의 압제로 인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과 아픔을 함께 하고 계심을 알리기 위함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아픔 중에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어떤 가수는 우리가 외로울 때, 외롭고 힘들고 아플 때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이 ‘여러분’이라고, 우리 이웃들이라고 노래했지만, 아파하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옛적을 기억하며 읽을 때 구약성경은 아주 특별한 언어로 주님의 그 사랑을 말씀하여 줍니다. ‘오직 주님’의 신앙을 권고하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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