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율도국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이스라엘 사회지배층에 속한 사람의 삶이 이러했으니 사회지배층과 아무 접촉점도 없던 사람들의 삶이 경제적 관점, 사회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비참하고 절망적이었을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즈음 재정총감을 지낸 튀르고라는 사람은 박애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노동자의 임금은 생명유지와 재충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을 절대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임금정책의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동서를 불문하고, 인류의 삶을 수천 년 동안 지배해 온 사고방식은 대동소이했던 것입니다. 노예제사회나 봉건제사회에서 노예나 농노로 태어난 사람, 그에 준하는 신분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고 미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이런 오래되고 공통된 역사적 경험을 기억하며 읽을 때 창세기 1장의 이야기처럼 놀랍고 위대한 복음은 없다고 지난 번 글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왕족과 제사장 같은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아니라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평등하고 존귀하게 창조하시고 그 모든 인생들에게 이 땅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복음을 듣고 몰려든 사회적 약자들을 모아 이루신 공동체라는 말씀도 드린 바 있는데, 오늘은 그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고자 합니다.
2. 이스라엘: 미국에 앞선 원조 ‘멜팅 팟 melting pot’ 애굽 역사에 ‘힉소스 시대’로 불리는 때가 있습니다. <힉소스>는 ‘외국인 지배자들’이라는 뜻의 애굽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힉소스 시대’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에서 온 여러 민족들이 애굽을 다스린 주전 18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의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전 16세기 중반에 아모세라는 애굽인이 이 외국인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신왕국 시대를 여는데, 힉소스 시대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와 소아시아 등지로부터 와서 정착했던 다양한 민족적 배경의 대다수 사람들은 졸지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노예로 전락합니다. 근 4천 년 전의 역사이기에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온 셈족의 소년이 함족 국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요셉 이야기나 힉소스 시대의 수도 아바리스가 위치한 나일 삼각주에 야곱 일족이 정착하는 이야기 등은 힉소스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서 읽을 때 어렵지 않게 납득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장 8절이 말하는 ‘새 왕’의 행적이 요셉의 시대와 4~5백년 정도 떨어진 주전 13세기 후반의 비돔과 라암셋 건축과 이어져 있는 것을 볼 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어느 특정한 왕을 가리킨다기보다 신왕국 시대의 애굽인 왕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야다>는 상대를 인정하는 친밀한 앎과 관련된 어휘인데, 신왕국 시대의 애굽 왕들은 요셉의 존재 그 자체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외국인 지배자인 요셉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요셉의 자취는 지우고만 싶은 흔적이었고, 외지에서 들어와 큰 무리를 이루고 살다가 노예로 전락한 외국인들의 존재는 출애굽기 1장 10절에서 볼 수 있듯이 늘 경계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왕국 시대의 애굽 왕들은 그들을 혹독한 노동으로 학대하고 통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이스라엘 자손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출애굽시키십니다. 그 때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 되었다고 출애굽기 12장 37절의 말씀은 전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수많은 잡족”이 그들과 함께 했다고 하는데, 그 수많은 잡족들은 필시 야곱의 후예들과 마찬가지로 힉소스 시대에 애굽 땅에 와 정착했다가 졸지에 노예로 전락하여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온 외국출신 노예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 “수많은 잡족”들이 출애굽한 무리의 대다수 구성원들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곳의 40~41절 말씀을 좇아 사백 삼십년의 세월이 흐른 것을 감안하더라도 칠십 인의 야곱 일족이 장정만 육십만이 되는 큰 무리로 생육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정만 육십 만이니, 총인구가 이백만을 족히 넘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2)
출애굽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이런 사람들이 모여 민족적인 배경을 포함한 자신들의 과거를 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탄생해 이스라엘을 이룬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유럽 각국으로부터 미국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름지기 서로에 대한 옛 감정을 잊고 미국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용광로 melting pot'에서 미국인으로 재탄생해야 한다며 미국을 '멜팅 팟 melting pot’으로 이야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개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미국에 앞서 존재했던 원조 ‘멜팅 팟’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을 기억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고 또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3. ‘멜팅 팟’ 이스라엘의 희망과 기억 진실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고 인간이되 인간답게 살 수 없었던 절대다수의 옛날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귀하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나라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희망을 보고서 몰려든 사람들을 모아 이스라엘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신 계명이자 또한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비전이 담긴 십계명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