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중보 기도를 통해서도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하지만 물질로도 도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할 때가 있고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물질로 도와주고, 사랑으로 도와주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도와주어야 합니다.

 쉴러 빌헬름은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도울 수 없을 때에만 도우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먹을 것을 줄 수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 집을 먹여 살리시겠지’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주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어서 배부르게 해야지 그냥 말로만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가서 그냥 말로만 옷 입으라고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옷 없는 사람에게는 옷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옷은 주지 아니하고 “하나님, 옷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천사의 옷을 벗겨서라도 그를 입혀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넘어진 자는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사명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학생이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작년까지 우리 교회 장학관에 있던 고려대 법대 4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시원에서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장학관에 있으면서 감사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아버지는 목사님이셨는데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혈압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곧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도사님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고학을 해서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에 붙고 나서는 어떻게 하나 막막했는데 장학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와서 참사랑을 배우고, 안정을 얻고, 먹고 자는 생활에 불편이 없어서 3학년까지 잘 공부하고 3학년 2학기에는 전체에서 1등을 했습니다. 지금은 장학금도 받아 아무 어려움이 없고, 고시 준비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고시원에 들어왔습니다.”

 반항하고 사회를 향하여 불만을 토할 만한 때에 이런 좋은 사랑을 받게 되어서 내 신앙도 찾고, 내 인격도 성숙하고, 내 앞날에도 힘을 얻어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되어서 참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형편에 처한 학생들을 위해 기도만 해 주면 안됩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장학관을 세워 도와주어야 합니다. 농촌 교회도 그냥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농촌 교회는 농촌 교회에 맞는 지원을 해 주고, 어촌에는 어촌에 맞는 지원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필요에 맞게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 때에 모두 손을 잡고 함께 기쁨을 나누는 복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