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죄를 둘로 정의할 수 있다. Scarlet Sin(주홍색의 죄)과 Gray Sin(회색적인 죄)이다. 전자는 객관적인 사실이 확연히 들어난 것으로 행위적으로 나타낸 죄, 즉 살인, 도적질, 강간 등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죄를 말하며, 후자는 마음으로 짓는 죄, 즉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음욕 등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의 죄이다. 예수의 보혈로 도말해 버린 붉은 죄의 본질을 새 의식과 회개가 전혀 없는 내면 그대로를 고수하는 죄성을 회색적인 죄라 말한다.
세리장 삭개오를 보자. 자신의 키 작은 장애를 극복하고 돈과 출세를 위해서는 물불가리지 않고 살아왔던 세리 삭개오는, 어느 시점엔가 자신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발견하고,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말을 걸어보아도 대꾸하나 안 하려 하고 팔을 잡으려 해도 냅다 뿌리치고, 앞을 봐도, 뒤를 보아도, 민족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저 매국노 삭개오!! 배신자 삭개오!! 목을 죄어오듯 세상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면서 내심 한 편엔 “그래요. 그런 삭개오였어요. 그러나 지금은요. 제 가진 것 절반이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구요.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을 겁니다. 그저 용서만 해주신 다면요....” 때마침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 높은 뽕나무에 단숨에 올라가서 자신으로선 도저히 해결 못하는 주홍색 내면과 예수님의 시선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예수님은 위선적이고 폐쇄적인 회색적 무리들을 헤치고 주홍색으로 뒤집혀진 보혈 한가운데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이처럼 정령 무서워야 할 죄는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주홍색의 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회색적인 죄에 있다. 시기와 질투의 죄로 아벨을 죽인 가인의 죄가 칠 배라면, 비록 악기 속에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률일지라도 라맥의 증오와 복수의 노래였다면 칠십칠 배의 죄로 둔갑할 수 있다는 반증이다.
80년대 어느 대학의 행정 실에 근무할 때였다. 휠체어를 끌고 다니면서 공부하는 젊은 학생이었는데 그렇게 밝고 생기 넘치는 얼굴 모습은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기억으론 총학생회 부회장으로 알고 있는데 따라다니면서 그를 도와주는 몇몇 학생들의 행동자체가 너무 자연스러워보였다. 그 순간 난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왜? 한국교회는 장애자와 비장애자와의 어우러지지 못할까? 설상 다닌다 해도 얼마안가 못 다니고 마는 안타까움에 서글픈 마음마저 들었다. 보이지 않는 이러한 zone이 바로 gray zone의 실체다.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 항상 gray zone엔 이러한 틀이 뿌리박혀있다. 율법이 위선이고, 거짓이고, 또 그 율법으로 주님을 죽였다 해도 내 믿음만은 율법이 아니다 라는 또 하나의 율법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교회 문제는 보이는 죄 때문이 아니라 그 죄를 움켜지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짓밟고 목을 조이려는 논리자체에 있다. 율법이 보혈의 의미를 짓밟아 버리는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한사람을 살리기 위해 아흔 아홉의 사랑과 희생이 아니라 한사람 때문에 아흔 아홉을 그르칠 수 없다는 조직체계에 그 문제가 있다. 바로 주님사랑은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어린양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가 인간의 주홍 빛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죄인의 공동체라면, 자신의 허물을 마음껏 말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선행되어야 하겠고, 또 그 안에 보혈이 있느냐에 교회의 존립이 있다. 왜? 보혈을 지나야만 주님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