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는 터키 서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로마에서 출발한 배들이 머물 수가 있는 항구 도시로 문물이 발달했다 한다.
항구 도시였든 관계로 문물의 교류가 쉬운 대신에 극히 문란 했다 한다
문란의 중심에 풍요의 상징이라는 아데미 사원이 있었고 이곳에서는 공공연하게 음란(매춘)행위가 벌어졌다한다.
극장터 주변 창고에 방치된 당시의 아데미 조각상을 보게 되면 유방 인듯 보이는 둥그른 것이 24개가
가슴에 조각되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노천 극장에서는 무용과 음악과 검투사들의 혈투와 맹수들의 싸움이 있었든 것으로 전해진다.
A.D 263년경 고트족에 의해 파괴됐으며 파괴 되기 전 세계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 였다 할 만큼 건축과 조각이
아름다웠든 도시였단다.
폭이 11미터나 되는 넓따란 도로가 대리석으로 포장 되어 말이나 마차들이 줄지어 달릴 수있었고 수도 시설도
잘되어 있었다 한다. 특히 바닷가 까지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니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지금도 길곁에 기둥들이
줄지어 서있다거나 무너지거나 길곁에 누워있는것을 보게된다.
기둥 곁에서 상가들이 밀집하여 호객행위를 하였을 것이고 식당과 술집들도 있었을 것이다.
상가터 바닥에 수놓은 타일 네지는 대리석은 정교 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현재도 부분적으로 남아있었다.
동,식물의 조각상들과 특히 아데미 신상이 극장 어귀에 있는 창고에 보관되어있는 것을 볼수가 있었고 메두스나
박카스 동상과 많은 장군들과 황제의 동상을 볼 수가 있다.
황제 숭배 사상이 강했다한다.
황제를 곧 신이라 했으며 도미티아누스가 황제 였을 때 이 사상은 극에 달했고 바울이 박해를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B.C 1세기경 인구가 30만에 달했으면 2만5천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 있었고 목욕탕과 수세식 변소와 도서관 등이 있다
우리에게는 바울 사도가 2년간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다든지 사도요한이 머물면서 요한 계시록상에 나와있는
7개 교회와 연을 맺은 지역이자 7개 교회에 편지를 썼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마리아를 이곳에 모셨다는 일화도 있고 따라서 성모 마리아를 모신 사원도 있었다.
또한 양피지를 최초로 사용한 지역이기도 하덴다.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파피루스를 사용했겠지만 수입이 어려워지자 양피지를 파피루스 대신하여 기록했고
바울의 텐트 사업도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글을 쓸 수 있는 원자재가 풍성했고 (당시 텐트로 사용된 자재가 양가죽)
텐트공으로서 신분을 감추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바울은 초기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하고 후기에는 서원에서 전도 했다 하는 그 도서관이 폐허 인 체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파피루스 보다는 보존성이 좋은 양피지 덕에 우리가 오늘날의 성경을 대할 수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데미로 인해 돈을 쉽게 벌 수 있었든 장식공들의 반대에 바울은 전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든 곳이다.
바울이 전도하면서 글을 쓰든 곳이자 바울 사후에 요한이 남아 있는 교회들을 위해 동분 서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디모데, 아굴라와 부루스길라 등도 있었겠지만 요한은 예루살렘교회의 정신적 지주였고 바울 사후 전도의 열기를
살리기에는 요한 만한 분이 없었을게다.
바울은 나면서 로마인이란 신분을 이용해 로마 식민지 사회를 마음대로 돌면서 전도를 했겠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친 로마인이라는 비난도 있었을 것이고 요한은 사도로서 또한 마리아 마저 모시고 있었으니 명백한 증인이 되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