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기도회 초청으로  이루어진 강영우박사 부인되시는 석은옥여사의 간증을

담당교역자이신 마은주전도사님께서 녹취하신 글이 있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올렸으니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석은옥 여사 간증

2011년 4월 18일 유학생기도회

명성교회에서 세계 각국에 자녀들을 유학 보내신 부모님들 앞에서 저의 지난 날의 삶을 간증하고 두 아들을 기른 엄마로써 저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당회장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 학생들이 세계 각국에 나가서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 하고 있는데 그 뒤에는 부모님의 노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시고 갚아 주실 줄 믿습니다. 


링컨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어려움 가운데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 꿈을 실천할 수 있게끔 격려를 해준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물론 어머니께서 훌륭하셔서 그런 얘기를 했겠지만 여기에 계신 모든 부모님들의 헌신과 격려가 얼마나 큰 지 훗날에 자녀들은 분명히 감사를 표시할 때가 올 줄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시각장애인 남편을 모시고 살아온 저의 삶을 궁금해 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 하십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와 같을 것이라고 과찬을 해주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가능할 수 있었음을 저의 삶을 통해 간증해 드리고 축복받은 저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2004년( 60살)에 은퇴를 준비하면서 자전적 수필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라는 책을 썼습니다. 시력이 없는 남편에게 지팡이는 안내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지팡이의 역할을 하는 Sighted Guide를 50년 전에 처음 시작하여 나는 그대의 지팡이라고 했고 남편은 시력은 없지만 어떻게 나에게 등대가 되었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지혜를 가지고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제목으로 책을 썼습니다.


금년이 맹인소년 강영우를 만난 지 만50년이 되고 아내가 된지는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제 9월 달에 저는 한국나이로 70살이 되고 미국나이로는 내년에 70살이 됩니다. 그래서 저의 친구들이 같이 칠순잔치를 하자고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가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맹인소년 강영우와의 난생 처음 만남

 

오늘은 이제 맹인소년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961년 5월 셋째주일 오후2시, 예전에는 조선일보사 뒤에 걸스카웃 본부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때 각 대학에 입학한 걸스카웃 멤버들이 모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스페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한 소년이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고 충격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고 누나까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어 여동생하고 사는 아이가 있다고 하니 이 사람을 위해 너희들이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후원금을 모아 전달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시각장애인이지만 그 당시엔 장님이라고 불렸고 아침에 장님을 만나면 재수가 없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중학교 교복을 입은 맹인 소년이 찾아왔고 저는 난생처음으로 맹인 학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을 만나게 된 순간 ‘나는 두 눈이 있어서 저 학생을 바라볼 수 있는데 저 학생은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했고 ’더군다나 부모님까지 없이 사는데 어떠한 꿈과 비전을 갖고 있길래 맹인학교에 다시 들어갔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표정은 밝아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후원금을 전달하고 우리를 지도하시는 분이 이 학생을 정류장까지 배웅하는 동안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성령님께서 저에게 용기를 주시어서 ’니가 가서 안내를 해주어라‘ 라는 제 마음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데려다주러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복을 입은 소년이(5살정도는)어려 보이고 저보다 동생같고 해서 손을 덥썩 잡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맹인을 안내하는 지도 몰라서 (지금은 정확하게 맹인을 안내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냥 손을 붙잡고 광화문을 안내했습니다. 막상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웬 장님을 대낮에 데리고 다니는가? 오늘 참 재수가 없다.‘ 하고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침을 뱉고 지나갔습니다.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맹인들이 그런 대접을 받고 사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10살부터 교회에 다닌 저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시력이 없는 자녀를 시력이 있는 제가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당연히 해야 하지않겠는가 하는 마음과 자긍심이 느껴지고 힘이 났습니다. 씩씩하게 손을 붙잡고 버스에 태워 주려했으나 버스차장이 태우려 하지 않고 다음에 타라고 했고 재수가 없어서 타이어에 펑크가 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시 버스를 기다리면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나’하고 물어보자 강영우 소년은 자신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재활을 하고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 이 어려운 고난이 하나님께 어떠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지를 목사님께 자문을 받고 힘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하자하고 헬렌켈러를 생각했답니다. 나는 시력하나만 잃었지만 삼중고를 겪은 헬렌켈러도 있지 않았냐!. 그러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노력하여 전 세계를 다니며 인간의 존엄성을 알리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나는 시력하나만 잃었지 말도 할 수 있고 걸어 다닐 수도 있고 손도 있다. 하나님께 분명히 영광 돌릴 때가 올 것이다. 하고 믿음가운데 사도바울을 자신의 롤모델을 삼고 서울맹아학교에 들어왔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말마다 가서 책을 읽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 강영우 박사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그러면서 저는 개인적인 사정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운동을 하다가 눈을 다치고 병원에서 2년 동안(국립의료원) 의료 치료를 받다가 실명선고를 받게 된 것 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잘하면서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그렇게 자랐는데 6․25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의 장남인 본인이 시각장애인이 되자 충격으로 뇌출혈로 8시간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는 그러한 상황을 겪었고, 그 후 주위의 친척들도 이들을 멀리하고, 유일한 혈육인 누나가 평화시장에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과로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재활을 하면서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맹인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딱 느낀 것이 내가 누나역할을 해주면 되겠다. 자원봉사만 할 것이 아니라. 마침 저도 외동딸이라 외로움을 달랠겸 편지를 통해 누나가 되겠다는 통보를 하고 그때부터 제가 누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1년간의 자원봉사 끝에 제가 누나가 되었습니다.

강영우씨는 맹인학교에서 성적이 좋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시력을 잃기 전에는 성적이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시력을 잃은 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니까 성적이 잘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6년 동안 봉사를 하다 보니까 제가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각장애인 교사가 되고 싶다는 기도제목을 하나님께 올리고 얼마 후 성모병원에 안과 주치의 의사선생님의 안내로 저는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학 1년기간 동안 매일 일기처럼 편지를 보냈고 미국에 시각장애인도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더라하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1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저희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고 강영우씨도 연세대학교 1학년에 입학을 했습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 시각장애인은 대필자가 동반해서 시험문제를 읽어주면 답을 말해주고 하는 일을 제가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스물여섯이고 강영우씨도 스물다섯으로 둘 다 성인이 됐고 더군다나 공부도 나보다 더 잘하고 같이 공부할 때 영어학원도 같이 데리고 다녔습니다.공부를 하면 나보다 강영우씨가 공부를 더 잘 했습니다. 동생은 저에게 아주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3.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불- 만남 그리고 결혼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섯이었고 저희 어머님은 그렇게 착한 일도 하는 것도 좋지만 늦기전에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선을 주선하셨습니다.

선을 볼 때마다 상대자에게 시각장애인 남동생이 있고  시각장애인 교사가 되기 위해서 미국에 서 교육을 받으러 갔다 왔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상대자가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거예요. 깜짝 놀래가지고 맹인동생이 있다고 하니까 성사가 안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좋은 청년이 제가 참 착하고 좋은 여성이라고 하면서 만나고 싶다고 그러는데 어떤지 강영우씨에게 같이 나가서 상대자가 어떤지 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둘이 같이 나갔습니다. 선을 본 후 저는 상대자가 어떠냐고 하니깐 동생은 별로 장래가 좋은 것 같지 않다고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내가 못 보는 것을 남동생은 잘 보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러면 더 이상 보지말자 하고는 그 사람과 안 만났습니다.

1968년초 연세대학교 학기말시험을 보는데 제가 대필을 하러 갔다가 내려오는데 나보고 왜 그렇게 빨리 상대를 고르지 못하냐고 빨리 시집을 가야 내 차례가 온다고 했고 그 생각을 하니까 아참! 그렇구나 내가 결혼하면 내 동생도 연세대학교를 다니다가 좋은 걸프랜드라도 누가 친절하게 해주는 사람이 생기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더니 동생은 나에게 그렇게 신랑감을 고르기가 어려우면은 나한테 시집오는게 어때? 라고 말을 했고 나는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동생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신연령이 나보다 훨씬 더 앞서 있고 여러 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도 저보다 훨씬 좋았지만 부부가 된다고 하는 생각은 전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 선을 본 자리에 데리고나가 그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내가 나중에 그런 생각을 했고 지난 모든 것 하나님께서 계획을 하셔서 7년 전부터 나를 길러 주셨고 미국유학도 하게끔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나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4. 프로포즈와 석은옥주


“하나님께서 우리 둘을 부부로 해서 한국에 나가서 한국의 장애인 교육을 위해서 우리가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그러한 큰 뜻이 있으셔서 이렇게 우리를 지금까지 길러 주신게 분명해 그리고 내가 연세대학교 1학년을 지내다 보니까 내가 공부를 잘하거든? 내가 자신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힘을 합하면 분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 우리는 그러한 좋은 부부가 될꺼야.” 

그러면서 “사실은 내가 누나를 사랑했거든 감히 내가 얘기를 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면서 제 손을 꼭 잡으면서 자기의 청혼을 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 이거구나 하나님이 이런 뜻이였구나, 하나님 제가 승락하겠습니다. 제가 정말 저의 삶을 7년동안 정말 아가페와 같은 그러한 사랑을 하나님이 주신 시력을 가지고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길렀는데 이제 연세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이렇게 자기 꿈을 가지고 한다는데 제가 여기에 도움이 된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는 오누이가 아니고 우리가 연인으로 시작하면서 원래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석경숙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석은옥으로 지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제가 성은 돌 석(石)씨예요 그러니까 7년동안 자기하고 어려운 돌밭을 걸어가는 7년을 했는데 3년을 기다려연세대학교를 졸업하면 10년, 인생 10년을 같이 돌밭을 지나가는 10년을 지나면 그 다음에 72년에 졸업을 해서 우리가 부부로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면 또 10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행복한 가정을 이루자 하는 은혜의 시대가 10년이랍니다. 그 10년 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옥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비전을 저에게 제시해주는 거예요 저는 그때 너무나도 탄복하고 하나님 이렇게 훌륭한 비전을 가지 사람을 저의 남편으로 주시고 제가 또 그 사람을 위해서 아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 감사했고 제가 너무나도 기뻤어요

그 다음부터 제가 석은옥으로의 삶은 92년에 끝났어요. 72년부터 82년까지 82년에서 92년까지 옥의 시대가 끝났거든요. 92년 이후에 저희 책을 많이 읽으신 분들은 옥의시대가 끝났는데 그럼 이제 다이아몬드의 시대에 사세요? 그러는거예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저한테 무슨 지혜를 주시냐면 주님의 시대를 삽니다. 이제는 우리 인간적인 마음으로 10년 10년을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랬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그러한 일들이 더 많이 더 좋게 해주셔서 이제 주님의 시대를 삽니다. 그래서 저의 이름이 석은옥주로 씁니다.

하여튼 저는 오늘날까지 많은 어려움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순종하면서 살았습니다. 여기에 많은 어머님 아버님들이 자녀들을 유학을 보내셨는데 저희도 72년도에 졸업을 하고 저희도 유학을 떠났습니다. 피츠버그 대학에 로터리클럽 장학금을 받아가지고 지금은 유학생들이 한국의 경제가 많이 좋아져서 그렇게 많이 힘들지 않지만 72년도는 200불 들고 유학을 갔고 그리고 한 달에 200불 나오는 생활비로 99불 방세내고 100불로 필요한 것 지출하였고 자동차라는건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주 허르스름한 아파트를 얻어서 남편 학교를 같이 가서 안내하고 교실에 앉혀 드리고 나는 도서관에 가서 매일 녹음도 해야되고 혼자 녹음할 수 없으니까 교회 여선교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책을 가져다주면 1시간씩 시간 있을 때 와서 읽고 테이프로 책한 권이 되면 가지로 가도 봉사자들에게 책을 가져다주고 그러면서 살았어요.

그러면서 제가 나이가 30이 되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잉태하는 축복을 주셔서 제가 첫아이를 임신을 했고 유학 당시 남편이 석사를 2개하고 교육학 철학박사로 박사학위를 받는 동안 학교 다섯블럭가는거, 두블럭 글로서리 가는거 그거 밖에는 모르고 모든 필요한 것은 전부 헌옷 파는데서 냄비도 사고 무엇도 사고 그랬는데 3년 7개월동안 2~3시간 자고 공부에만 집중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공부를 하는데 편리한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불을 끄고 누워서 전자책을 배에다가 놓고 누워서 읽으면되요. 정상인인 우리는 꼭 책상에 앉아서 해야되니까 어깨도 아프지 눈도 아프지 그래서 어떨 때는 참 편리하겠다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그다음에는 녹음도 카우치나 의자에 그냥 앉아서 듣기만 하면 되는거예요. 그러면서 밤낮으로 공부를 해가지고 3년 7개월 만에 박사를 했습니다.



5.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축복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


그런 와중에 저는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두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고 76년 4월 25일 제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와서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까 한국의 장애인을 위해서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한국에다 연락을 한거예요.  한국에서는 최초로 장애인으로 박사를 받았다 미국신문에서도 굉장히 크게 냈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도 잘했고 그 당시에는 박사들이 많지 않았을 때니까 76년도에 피츠버그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서울대학에 간거예요.

그 당시 시각장애인에 대해서는 지식층에서도 거부감이 있어서 어떻게 맹인이 같이 동료로 일을 하느냐하면서 다들 싫어하는거예요. 그리고 또 다 불편스럽다고 문교부나 대학이나 하나도 안받아주는거예요. 그래서 8개월을 이렇게 저렇게 해도 도저히 한국에서는 여건이 안된다고 해서 실망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면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동안 생활비로 나오던 200불도 끊어졌지, 학생비자도 끊어졌지, 6월달에 둘째아이가 출생했지 그러니까 박사 가장이 무직자로 갈 때도 없고 생활비도 떨어졌고 할 수없이 우선 비자를 살려야되니까 학생비자를 위해 박사과정후(포닥)을 6개월 신청해놓고 그다음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미국에서 직장을 찾기로 했어요. 그 당시에 남편이 교육청에 근무를 하게 되면 영주권 신청을 해주겠다고 해서 인디아나주로 취직이 됐습니다. 저는 두 아이만 데리고 인디아나로 이사를 와야 하는데 그 당시까지 운전을 할 줄 몰랐어요 그런데 아는 분이 헌차 800불짜리를 사도록 도와주셔서 그 차를 끌고 1977년 1월 3일 날 12시간을 운전을 해봤어요. 그 차가 얼마나 헌찬지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하이웨이로 3살짜리는 옆에다 앉히고 그리고 제가 운전대를 붙잡고 무사히 잘 가게 해주세요 하고 하나님한테 기도를 한겁니다  그때 갑자기 하나님 말씀이 생각나는거예요 오늘날까지 너를 지켜주신 하나님이 계시니까 두려워하지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제가 처음에 아내가 되겠다고 3년을 기다려야 했을 때 그때도 두려워했거든요 3년을 어떻게 기다리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에 참 순수한 마음이고 용기가 있었던거 같애요

3년 후에 유학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거고 나이가 30이 다 되가는 때에 어떻게 될지 장래를 모르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랬을 때 참 두려웠거든요

똑같은 이사야의 말씀 붙잡고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두려워말라’ 그때도 기도했는데 이날도 운전대를 잡고 1월 3일날 눈이 펑펑 오는데 처음가보는 450마일이 넘는 인디아나를 가보는데 걱정이 되더라구요 하나님 말씀 붙잡고 기도하면서 운전을 하면서 12시간만에 거기를 도착을 했습니다.


6.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가운데 어릴 때 가졌던 교육자로의 꿈을 이루어 주셨다.


그리고 이제는 남편이 직장을 가졌으니 나는 이제 두 아이를 데리고 남편출퇴근만하면 아이들만 데리고 놀면 행복하겠다 그랬는데 한 2주일후 그 교육청에서 당신은 과거에 뭐했길래 맹인남편이랑 사느냐 우리 교육청에 선생님이 부족하다 그때에 77년도에 교사들이 장애인들이 일반학교에 통합되는 교육법이 시행되는 때 그래서 많은 장애아들이 공립학교로 올수가 있게 되었고 교사가 부족하니까 어디서 교육을 조금만 받았으면 임시교사라도 하도록 하는거예요. 남편한테 나에 대해 물어보면서 우리가 그런 사람을 찾고 있다고 그래서 저의 얘기를 한거죠 1년동안 미국에 펜실베니아에서 인터네셔널티쳐 트레이닝도 받았다 한국에서 교육학 공부도 했다고 하니까 그럼 우리가 임시교사를 쓰겠다고 했는데 막상 저는 7개월짜리 아들과 3살짜리 아이를 어디 누구한테 맡기겠어요? 조금 적게 먹고 살자 그런 생각만 했는데 남편이  1-2년 사이에 선생이 부족해서 그런다니까 한번 서류라도 제출해보고 도전하자. 그리고 내가 집에 와서 아이들 도와줄게 그러는거예요 사실 미국에서 잠깐 연수교육을 받은거지 자격증은 없으니까 아이들 교육과정도 써야하고 채점도 해야 하는데 어떻하나 했더니 남편이 저녁에 가르쳐준다고 해서 용기를 내 가지고 미국사람들한테 추천서를 받았더니 4,5년전 교육을 받았던 교육청에 있는 사람들이 기가 막힌 추천서를 보내주셨다. “교사의 자질은 어린이들을 참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교사의 자질이다” 저도 어렸을때 고등학교때 스위스의 페스탈로찌와 같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했다. 그래서 나도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는데...이 사람들이 추천하는 데 교사의 자질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더군다나 , 장애인을 가르치는 사람은 장애인에 대한 compassion-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하는 사람이다. ,즉. 너의 아내는 벌써 10년전부터 당신을 잘 보살폈잖느냐, 그러니까 이러한 사람을 너희학교에서 채용하면 너희학교 학생들은 굉장히 lucky한 것이다.  이렇게해서 대.여섯분의 추천서가 들어오니까, 한달만에 임시 교사로 채용했고 그 때부터 운동화만 신고, 뛰어다니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아침에 출근할 때 7개월 둘째는 옆집에 맡기고, 3살된 아이는 유아원에 맡기고, 남편학교에 태워다주고 그다음 내 학교에 가고, 퇴근할 때는 남편& 아이들 pick-up하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하기를 28년을 한 직장에서 -하나님께서 어렸을 때 교육자 되고픈 꿈도 하셨다.


7. 두 아들을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이야기-  잠언에서 지혜를 얻어


하나님께서 두 아들을 주시는 축복으로 어머니가 되었다, Baby is born, Mother is born.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도 태어나는 것이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요, 특권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Identity, 크리스챤 Identity로 길러야겠구나-그럴러면 내가 성경을 읽어서 그 지혜를 알아야겠구나-잠언을 읽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 되는것이다-잠언을 읽으면서 기도하면서 지혜를 때마다 구하면서 크리스챤의 Identity로 키우는데-사는 곳에 한인교회가 없어서 미국교회에 나가서 유아세례도 받고, 여름방학이면 vacation bible school등, 여러 곳을 다니며 Christian Identity로양육했다.

아이들에게 운전하면서 기독교방송을 들려주는데-하루는 14살된 큰 아들이 다른 방송도 재미나는게 있다며 말했지만-엄마는 운전할 때 이 채널(CH,9.01)을 틀어놔야 운전을 할 수있다며. 나중에 네가 운전하게 되면 그 때는 네 맘대로 선택하라-미국에는 15살이되면, 드라이브 라이센스 트레이닝 기간동안 엄마가 운전석 옆에 앉아 있어야하는데-하루는 15살이 되자 큰 아들이운전을 하면서 “엄마! 제가 운전하니 채널 바꿉니다” 하길래 네가 운전을 하고 있지만 지금은 엄마가 옆에 있으니 엄마채널로 고정하고, 네가 다른 채널을 듣고 싶으면-나는 이 차에서 내리겠다-엄마가 내리면 네가 driver's license 못받으니까 몇 개월만 기다려라-이러면서, 집에서나 운전할 때나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고 대학 들어가기 까지 한글교육 겸 잠언을 영어와 한글로 두 번을 읽게 했다.

 지금은 아들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때 읽었던 잠언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대학교에 와서는 자유분방한 애들도 많은데 그때 읽었던 잠언이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제가 다른 것은 못했지만, 성경을 같이 읽을 수 있도록 저에게 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8. 가정에서 어머니는 HEART (심장), 아버지는 HEAD (머리)


가정에서 어머니는 heart=심장이라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격려하는것입니다-수없이 칭찬하고 격려하고 자녀들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주어야합니다.

한국 어머니들은 대체적으로 성적표가 나오면 나쁜 것에 눈이 먼저 간다-그러나 이제는 “어머 네가 이런 것을 잘하는구나! 성적을 잘 받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런 것을 주셨네라고 해야합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이 유학중인 자녀들에게 말씀을 읽으면서, 기도중에 은혜 받은 것을  이메일이나 편지로 같이 나누고 글로 써보내면 아이들은 더 큰 은혜 받고 감사해할 것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head가 되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떤 비젼을 가지고 살 것인가에 대해 더 연구하고 관심을 가지며 지침을 주시면서 후원하시고 격려해 주셔야 아버님을 더 존경하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서 대를 이어가는 아들,딸들이 될 것이다

남편이 시력을 잃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약점이 있기 때문에, 그 약점을 통해서 두 아들들이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신 것입니다.


세 살 때 우리 아들들의 기도가 아주 유명한 말로 남아있습니다

Dad time stories in the darkness (어둠속에서 읽어준 아버지의 이야기)

성공한 사람이 되기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라

남편이 아이들을 재울 때 불을 끄고 점자책을 읽어주었다-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이야기& 아브라함이야기 등등.. 아빠가 점자로 성경을 읽어주고 대화하면서=이 다음에 네가 커서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너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이 세상을 위해서 공헌할수 있는 사람이 되라, 저 역시 슈바이처박사를 좋아하는데 성공한 사람이 되기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라,

세상적으로 명예나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은 모임이든 , 큰 모임이든, 어떠한  직장이던지, 네가 있음으로써 참 필요한 사람, 빛과 소금이 되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너희 동료들이 너를 좋아하는 존경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엄마로써는 더 기대하고 있다. 남편도 이러한 꿈을 가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그러한 곳에 헌신하라며 가르치셨다. 큰 아들이 세 살 때 아빠가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안과 의사가 돼서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더 나가서 아버지의 눈까지 고쳐보겠다는 꿈을 세 살 때 가지게 되었다,


저에게 시각장애인과의 만남은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합니다, 50년전 시각 장애인을 만나게 하시고, 28년을 시각 장애인 선생을 하게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비젼을 주셔서 큰 아들은 안과의사로, 작은 아들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 좋은 법관이 되게 하시고 모든 것이 이러한 일들을 하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입니다. 70을 바라보며 저의 삶속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 아이들의 뜻이 하나님 기뻐 받으시는 좋은 일꾼으로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남편과 처음으로 같이 쓴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어두움을 비추는 한 쌍의 촛불*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존귀한 생명을 허락해주시고

저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딸이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인간애를 허락해주시어

곤궁에 처한 맹인소년에게 인정을 베풀어 고귀한 만남을 주셨고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기본 능력과 성취 동기를 허락해 주시어

사랑의 근거한 교육자가 되겠다는 저의 소녀의 꿈을 실현하게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나님께서는

저를 여자로 태어나게 하시어

지아비를 섬기고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사는 아내의 행복을 알게하시고 가정을 꾸미고 단장하는 기쁨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생명을 잉태하여 출산하는 고귀한 체험을 하게하시고 모성애를 허락하시어 두 아들을 양육하는 기쁨과 보람을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지혜와 승리의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자식을 양육하는 지혜를 성경에서 찾게하시고

믿음으로 험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신앙을 길러주는 노력을 하게 하여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저를 도구로 남편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회에 봉사하는데 동참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고귀한 인간 생명을 주신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 생애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남은 여생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세상에 사는 동안 저에게 주어진 사명을 모두 수행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 아 멘!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 몸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cf. 석은옥 여사와의 대화中에서


큰며느리가 미국인이면서 산부인과 의사인데 큰 아들이 성격이 매우 까다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시어머니인 석은옥 여사에게 “어머니! 정말 힘들어요 언제 좋은 날이 올까요?”

그렇게 물었대요. 

그때 석여사님이 어떤 책에서 본 문장이 생각나서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Your everlasting patience will be rewarded sooner or later.

(너의 끊임없는 인내는 머지않아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랬더니 며느리가  "Mother! I'd like to the reward sooner!

(“어머니!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라고,

그러자 순간 주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셨대요.

며늘아! Later  one  will  be  greater! (늦게 오는 것이 더 좋은 것이란다. 더 위대한 것이란다) 그러자 며느리의 얼굴이 환해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