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낫기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몸이 안 아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마저도 신체 어느

부분이라도 아프게 되어 있다. 심지어 어느 분은 종합병원이라고 할 만큼 병을

달고 다니는 분들이 주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치료하는 의사마저 몸이

아파서 진료할 수 없을 만큼 고통 속에 있는 분들이 있다.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고질적인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어

병 고치는 은사를 발휘하는 교회가 많다. 그런데 그런 은사를 발휘하는 목회자

마저 병을 갖고 있는데 자신의 병을 치료도 하지 못하면서 남의 병을 고쳐준다고

한다. 그것을 숨기면서까지 하면서 치유은사를 남발하고 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아프게 된 구조를 갖고 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픔을 주셨는가? 하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되었지만 병의 이름은 나날이

늘어나고 병명도 모르고 죽는 인간도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죽는 부류의 사람들은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이사야 53:3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베드로전서 2:24에 이사야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병에 걸려 고통당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음을 얻었다는

증거를 얻어야 한다.그런데 우리는 온 몸이 아픈 곳이 많아 나았다는 증거보다는

아프다는 증거가 더 많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아픔을 주시는 것일까?

그것은 병에 걸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라는 의미보다는 이미 병을 고쳤음을

알려주는 표시로 아픈 것을 주셨다면 우리의 입장과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통 속에 있으라고 준 병이 아니라 나음을 얻었다고 하는 확신을 주시려고

아픔을 주셨다면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는 증명을 받아야 한다.

현재 치유사역 중에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아픈 환자들의 아픈 부위를 만지면

자지러지게 아프다고 소리를 치는데 두세 번만 지나가면 언제 아팠냐? 하면서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아주 고질적인 병을 갖고 있는 분들은 한번 만에 낫는 분도 있지만

몇 번을 거쳐 치료되는 분들도 있다. 이들을 치료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진정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낫게 해 주시는 절차를 목격하게 된다.

본인은 물론이지만 주변에 있는 분들이 이런 감격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구조는 눈, 귀, 콧구멍 두 개로 되어 있는데 입은 하나로 되어 있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뇌졸중이나 파킨스, 중풍으로 근육이 마비될 때 입과 혀가 절반이 나뉘어서 마비된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다. 왼 쪽이 마비되면 왼쪽 입과 혀가 마비되며 오른 쪽이 마비되면 오른쪽 입과 혀가 마비된다.

 

   우리 몸은 이렇게 두 구조 속에 나뉘어져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몸에

흐르고 있는 신경선이 서로 짝을 갖고 있지 않다고 일반적인 견해 속에 알고

있다. 그런데 치유사역을 하는 어느 장로님은 우리 몸에 왼쪽은 고혈압 선이

오른 쪽은 저혈압 선이 흐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혈압 선에 의한 당뇨가 있는 분은 합병증이 거의 없지만 저혈압 선에 의한

당뇨는 반드시 합병증을 유발하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몸에

흐르고 있는 기가 일종의 신경선이라고 한다면 서로의 짝이 없다고 주장해왔던 현대의학에 과감히 도전하는 이론이 될 것이다.

 

   이 선의 통로를 올바르게 안다면 누구든지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의에 힘을 의존하여 치료될 수도 있지만 본인 스스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분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분이 치료하면 혈의 자리를 누른다고 생각하면서

피가 잘 안 통하니까? 피를 잘 통하게 하는 치료방법으로 착각하고 있다.

 

   우리 몸에 피가 제대로 흐르지 않으면 우리 몸은 썩게 되어 있다. 우리 몸에

피가 멈추는 법은 없다. 다만 혈관이 작아져서 흘러가는 힘이 적어지거나

통과하는 양이 적어진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피가 멈춰버리면

우리 몸의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하여 일부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혈의 자리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는 고혈압

선과 저혈압 선을 따라 기를 회복시키는 치유사역으로 현재 진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학에서 생명의 근원이 되는 우리 몸의 구조는 심장이라고

하며 동양의학에서는 위장이 생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장로님의 사역에서 생명의 근원은 우리 몸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배꼽이라는 사실이다. 배꼽 위의 부분을 올바르게 관리 치료한다면

우리 몸의 정수리까지 치료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배꼽 우측이나

좌측을 깊숙이 누르다보면 자신이 아플 정도 고통이 따른다면 분명히

치료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치료사역은 이미 완성된 것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뿐만 아니라

아픈 것이 나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이 목적이다. 그런데 모든 병에서

나음이 입었다고 했는데 기도하거나 금식해서 낫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못 믿는 결과일 뿐만 아니라 이미 나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다. 그런데도 내 몸 하나마저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지구를 다스리고 우주를 정복하려고 하는지, 아무리 의학과 과학이 발달되어도 내 육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복음은 이미 완성되었는데 미완성으로 받아들여 믿고 있다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유월절을 지켜야 하고 다른 절기나 절차를 지켜야 한다면 아직도

율법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기도와 금식으로 낫는 차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았다 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로마군사로부터 채찍에 맞음으로

모든 병이 나았다고 하는 믿음은 어느 누구에게만 특별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미국 여성이 몇 대에 걸쳐 신앙생활을 해왔던 분인데 50대에

도저히 치료될 수 없는 불치의 병, 폐암에 걸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만을 터트리며 반항했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병원 진단으로 인해 그 여인은 날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왜 생겨야 하는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리고 어떤 죄를 지었을 길래

이런 무서운 병에 걸려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할까?” 하고 무기력한 삶을

보내다가 죽기 전에 성경이라고 제대로 읽고 죽자고 결심한 뒤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이 눈에 속속 들어오기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대목에서 놀라운 감동으로 눈물, 콧물을 흘리는 참회의 경험을 하게 됐다.

 

    자신이 철저한 죄인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몇 시간을 참회의 시간을 보낸 후 그 다음에 무슨 말씀일까? 하고 계속 읽기 시작한 것이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는 말씀에 자신의 병이 이미 나아진 것을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검진을 받았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혹시 쌍둥이가 아니냐? 이미 그 여인을 몇 개월 전에 죽어야 하는 사형선고를 받은 여인인데 어떻게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가? 하며 반문하게 된 것이다. 의사도 못 믿을

정도가 아니라 그 녀 자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에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올렸다.

 

   아직도 낫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런 금식과 기도보다 이미 나았다고 하는 믿음으로 아픈 병이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확인해야 하는가? 장로님과 함께 치료사역을 하면서 느낀 점은 타잔 소리를 내면서 자지러지게

아프다고 했던 분도 아픈 부위를 세 번 정도만 만지면 그 아픈 부위가 언제

아팠냐고 한다.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인가? ‘아야’ 했던 사람인가? 아니면 장로님이

마술을 하면서 요술을 부린 것인가? 아픈 곳을 치료해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아픈 곳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이미 과거에 다 치료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이라면 우리는 기도와 믿음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치료받기 위해 기도와 금식이 아니라 이미 치료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 속에 기도와 금식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좀 품위 있고 수준 있는

신앙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당 굿하는 무속적인 신앙에서 탈피하지

않고 언제까지 거기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지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이준호목사

(창골산 칼럼니스트)

   570220lj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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