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7 3월 특별 새벽집회 담임 목사님 '창조주를 고백할 때 생기는 일' 말씀 요약, 창 1:27-28, 작성자: 이용석 집사>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세계관을 항상 인식하고 경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중에 이제 1순위가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유물론자들의 생각에 모든 것은 사물일 뿐이지 그 안에 어떠한 특별한 것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창조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 신앙 안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이 세상이 우연으로 만들어지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창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이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유물론적인 세계관은 모든 것은 물질일 뿐입니다. 우리가 유물론의 세계관을 가지면, 우리 인간은 단순한 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생명 같은 것은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윈주의도 우리 기독교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핵심적인 이 세상의 가치입니다. 다윈주의 역시 유물론적 관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은 우리는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기 때문에 모두가 존엄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윈주의는 존엄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냥 세포에서 진화되어서 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존엄성이 없는 것입니다.
다윈주의에서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 똑같은 것으로, 우리는 다만 조금 더 진화된 형태일 뿐입니다. 특별히, 진화론의 핵심적인 가치는 적자 생존입니다. 가장 제일 힘세고 제일 특별한 것들이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뒤틀리게 합니다. 내가 살아남고 나만 잘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잔혹하고 잔인한 것은 다윈주의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자 생존으로 세상이 정글과 똑같은 것입니다. 정글과 사람의 세상은 달라야 합니다. 정글에서는 힘센 놈이 다 먹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면서 만드신 세상인 것입니다. 진화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일 뿐입니다. 과학이 당연히 사실처럼 보이는 일들이 진화론 안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진화론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인간의 존엄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화론을 통해서는 도대체 나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절대로 목적을 주거나 답을 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물론적인 해답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세계관에서 우리의 힘과 적자 생존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인간상은 인간의 정체성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 안에는 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는 비물질인 영혼이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의 육신과 영혼은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 창조의 세계관, 특별히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우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말씀은 오늘 말씀 안에도 있지만, 이것과 평행 구절이 되는 시편 8편에도 있습니다. 시편 8편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성경은 시편 8편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 같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는 존재입니다. 기독교 철학자인 마크 세이어스는 우리 인간의 정체성은 수직적으로만 알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정체성은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아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수평적으로 아는 인간의 정체성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수평적으로 나의 정체성을 깨닫고 있습니다. 다 사람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둡니다. 우리가 나의 존재의 정체성을 더 인정받고 싶어서 이상한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의 정체성은 반드시 수직적으로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의 가치가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로 꼭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도와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만났을 때, 이 만남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귀한 존재인지와 사랑받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꾸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에 매몰되지 말길 축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서 자꾸 내 정체성을 발견하자고 하면, 우리는 늘 목마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수평적인 것들은 다 흔들리는 것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꼭 알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아름다움은 우리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여겨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존귀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화론도 유물론도 절대로 줄 수 없는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수평적인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았던 사람이 사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세계관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분명히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건강해지고 마음의 질병이 들지 않으며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이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27절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 같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머리 위에 세상이 씌어줄 수 없는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어져 있음을 믿길 축복합니다.
창세기 1장을 찬양하는 말씀이 시편 8편입니다. 실제로, 시편 안에는 창조를 찬양하는 구절이 정말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저자가 얼마나 그의 세계관과 신앙이 창조 신앙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일치를 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세계관이 파편적으로 혹은 두세 개로 나뉘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신앙과 교회 밖에서 신앙이 같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과 삶과 생각을 포함해서 우리의 전부를 주님께 내어드려야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관이 나눠져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이 나눠져서는 안 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적응해야 되지만, 세상에 순응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세상에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순응해 버리면서 가나안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의 세계관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예수님 잘 믿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세상에 나가서는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을 따라 유물론적이고 진화론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삶이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뜨겁게 믿으면 뜨겁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믿으면 분명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원화되는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그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 신앙을 갖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 세계관을 가지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크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창조 세계관이 없고 하나님의 크심을 모르면, 자꾸 내가 커지게 되고 교만하게 되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세계관이 일원화되면, 우리의 삶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은 당연히 그 앞에서 겸손해지고 조용해지며 주님 앞에 양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을 알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무엇인가 어딘가에 존재하는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중에 떠다니는 그러한 귀신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영원토록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창조 신앙을 바로 가져야 되는데, 이것이 첫 단추입니다. 첫 단추를 잘 껴야 모든 것이 바르게 정렬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창조 세계관을 바로 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바로 알게 되고 그에 따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전도서의 핵심적인 용어가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 입니다. 이 헛된 것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 전도자는 마지막에 '너는 젊은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창조 사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를 기억하는 창조의 세계관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내가 그냥 우연히 태어나서 그냥 왔다가 가는 사람이면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존귀하신 하나님의 작품임을 알고, 내 존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도 목적을 가진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유물론적이고 진화론적인 삶이기 때문에 어떤 삶을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행복과 쾌락을 쫓고 세상에 좋은 것을 다 가지는 그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누리는 그 행복과 쾌락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묻어 있으며, 우리는 목적을 향해 지금도 나아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나의 세계관이 나의 믿음이 나의 생각이 하나님께 맞는 생각인지 아니면, 자꾸 세상에 젖어서 세상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잘 판단해야 됩니다.
휘튼대학교의 월튼 교수님은 '교회를 위한 구약 신학'이라는 책에서 전도서를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우리는 세상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시도를 포기하고, 오직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진리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선한 일들과 역경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즐거워하라는 전도서의 메시지는 신약 성서가 결코 제공해 주지 않는 삶에 대한 통찰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전도서 안에는 우리가 인생의 자아를 실현하고 유물론적으로 살아가는 시도를 포기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과 하나님이 주시는 역경까지도 맡기는 창조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복력이 있는 것은 우리는 역경을 만났을 때, 그냥 역경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여전히 있음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역경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은 자꾸 세상의 방식으로 우리를 정의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창조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통해서만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 아이들이 꼭 그 정체성을 갖길 바랍니다. 우리 모든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건강한 아이로 자랄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