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0 새벽2부 예배 담임 목사님 '눈물과 믿음의 자리' 말씀 요약, 요한복음 11:33~35, 작성자: 이용석 집사>
   성경에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장면은 세 번 나옵니다. 누가 복음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사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같이 나오는 회당장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사건,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생명의 소망을 갖는 가운데,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은 주님께서 행하시고 약속하시며 본을 보이신 일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가능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시고 생명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죽은 자까지도 살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끊어진 상태에서, 심장과 뇌가 멈추고 더 이상 모든 기관들이 동작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항상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그 능력을 사용하실 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때는 우리에게 표적으로 어떠한 사인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이 깊은 의미를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리는 이 모든 일들이 그냥 능력만 있으면 다 살리는 그런 일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나사로의 사건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기적과 이사와 표적이 너무 많지만, 그 중에서 복음에 필요하고 관계된 것들만 우리에게 전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은 맺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복음과 깊은 관련이 있는 복음의 중요한 한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때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중에 오시면서 지금 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지금 다 예수님의 통제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하는 능력과 미래를 결정하실 능력과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슬퍼할 때는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눈물의 현장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참으로 함께하셨고 우리의 마음을 아셨다라는 증거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쓰러져 있는 우리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현장성을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모든 감정을 초월하는 것으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어쩌면 가장 현장적이고 실제적이며 실시간적일 수 있습니다. 정작 믿음의 본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이 메마르면 현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의 아픔에 함께 울어줄 수 있고 세상에 고통당하는 자들의 아픔을 함께 비통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음의 현장성을 갖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갖는 것이 '소망의 현장성'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는 비통해 하셨는데, 이번에는 슬퍼하는 자들을 꾸짖으시고 "아이가 잔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또 다른 복음의 현장성을 보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의 슬픔과 절망 가운데 소망을 선포하는 '믿음의 언어'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현장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들입니다.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절망하는 자들에게 믿음의 말을 선포하고 그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요즘에도 세상의 언어에 찌들기가 참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떠하든지 예수님처럼 믿음의 말을 끝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의 언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능력을 전하는 사람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삶의 비통하고 괴롭고 슬퍼하고 절망적인 현장에서 함께 울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믿음의 선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께서 절망의 현장에서 함께 울어주실 수 있는 그 누구보다도 현장을 지키시는 분이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절망의 순간에도 잠들어 있는 우리에게 믿음의 언어로 깨워주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 가셔서 위로하시고 살려주시며 역사하시는 현장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교실의 사역이 아닙니다. 복음이 교실에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신앙이 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어선 안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서 세상에 나가서 세상을 살리고 일으켜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서 믿음의 말을 하고 함께 울어주고 안아주며 기뻐할 때, 주님께서 반드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영원토록 그 일들을 통해서 복음이 이 땅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시며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더욱더 이런 일들을 넉넉히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멋진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믿음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더욱더 세상에서 복음의 현장성을 갖고 뜨겁게 말씀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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