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 |||
지식론 |
제 1 장 |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 |
제 2 장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 ||
제 3 장 |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 ||
제 4 장 |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으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 | ||
제 5 장 |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우주 창조와 그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 ||
성경의 이해 |
제 6 장 |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 |
제 7 장 |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확립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악랄한 거짓이다 | ||
제 8 장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증거들 |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면된다 | |
제 9 장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 ||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
제 10 장 |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해서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모든 실들과 대조하고 있다 | |
제 11 장 |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 ||
제 12 장 |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하나님만이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 ||
제 13 장 |
성경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예수님의 신성이 핵심]는 것을 가르친다 | ||
창조 |
제 14 장 |
우주와 만물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함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명백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 |
제 15 장 |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초적 순결 | ||
섭리 |
제 16 장 |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 | |
제 17 장 |
섭리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적용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 ||
제 18 장 |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사용하시며 저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모든 더러움에서 순결을 유지하신다 |
제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 1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이 되어 있는가?
1.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 내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는 바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로 우리 자신의 빈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잘 드러내 준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 진실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다.
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한편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교만은 온 인류에게 본유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러한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자기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놀라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경험하지 않고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충분히 없다. 우리에게는 완전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다.
제 2 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 조건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유익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종교 혹은 경건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등 모든 것을 인식하지 전에는 결단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은 한 진정으로 그리고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허신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이 그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올바로 찾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것이 신앙이다.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내포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뜻한다.
제 3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1. 이 자연적 은사의 특징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인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사실 우상 숭배에 이 관념에 대한 풍부한 증거라 하겠다.
2. 종교[경건, 예배]는 임의의 발명품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항상 실재한다. 가장 대담하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자일수록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장 심하게 놀란다[렘 26:36].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며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마음에서 지워 버리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찾고 있다.
3.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의식이 새겨져 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을 동경하게 된다.
제 4 장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
1. 미신
자신이 받은 종교의 씨앗을 마음에 소중히 키우고 있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겨우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그것을 무르익게 해서 때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시 1:3) 어떤 사람은 미신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저버린 사람이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다 (롬 1:22).
2.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생래적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이미 제시되었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의 의식을 거스려 싸우며 하나님을 이 의긱에서 물아내고 천상에서 파멸시키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어지지 않는다.
3. 우리는 자신의 망상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은 모든 자기 자신의 망상에 예배하며 찬양한다. 진리와 일치하지 않은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4. 위선
적어도 강요당하지 않은 한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기 전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당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자발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심판을 피할수 없기 때문에 혐오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일단 절망이 엄습해 오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며, 형식적이나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전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제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중한다.
제 5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 창조와 그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1-10]
1. 하나님의 자기 현현은 명백하기 때문에 어떠한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
복된 생활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요 17:3).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 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2. 하나님의 지혜는 온 인류에게 제시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을 깨닫게 마련이다. 인체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3. 인간은 신적 지혜의 최상의 증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가슴에서 젖먹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른 웅변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이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
4. 인간은 배은 망덕하게 하나님을 대항한다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일백번이라도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광란이야말로 얼마나 가증한가?
5.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동
분명이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실로 우리가 받는 판단력에 따라 정과 사악(邪惡)을 분별할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나라에 심판자가 안 계시는가?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하고 찬양해야 할 참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영상적인 신격[우주 정신]을 고안하고 있다.
6. 창조주는 자신의 주 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가! 우리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지 않는 한 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감추어 질 수가 없을 것이다.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께서는 인류 사회를 다스리실 때, 섭리를 잘 조절하셔서 무수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자와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명백하고 일상적인 지시에 따라 경건한 자에게는 관대하심은 악하고 범죄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신다.
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요, 특별히 그의 부성적인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주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다수가 잘못에 빠져들어 그와 같은 눈부신 극장 안에 있으면서도 눈먼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특수한 지혜의 문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조절하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9. 우리는 머리로 하나님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하신 일을 보고 숙고해야 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공허한 사색으로 만족하며 단순히 뇌리에서 맴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지각하면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만 한다면 건전한 것이 되며 결실을 맺는 지식이다. 또한 하나님은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 하나님을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10.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마땅히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극시킬 뿐만 아니라 내세에 소망을 갖도록 각성시키며 용기를 복돋아 주어야 한다. 신자들이 자주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게 될 때에 불경자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형벌을 전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매우 확실히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의 각 사역에서 특히 그 전체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림에서처럼 실제로 표현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경배드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침내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11-12]
11. 창조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뚜렷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1)
지혜가 뛰어나면 날수록 그 예술과 학문이 잘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채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명료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다만 혼란의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게 된다.
[인간은 오류를 고집하는 한 핑계할 수 없다,13-15]
13.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 행위를 거절하신다
순수한 종교를 부패케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자신의 견해에 따라 움직이는 자는 모두가 다 필연적으로 이런 데 빠지게 된다) 유일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자라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또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비록 나쁜 결과를 수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하나님에 대해 율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도 모두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였다 (요 4:22)
14.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아니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지 않는데도 자기를 알리시기 위하여 각종의 풍부한 인자하심으로 인류를 친정하게 이끄시는데 인간은 자기의 길 곧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15.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 둔감의 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신지식을 맛보게 되자 우리는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산을 치켜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의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 6 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뿐이다
우리에게는 정확히 우리를 우주의 창조주 앞으로 인도할 다른 훌륭한 조력자가 더 첨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빛을 더하셔서 이 말씀으로 구원을 알게 하셨던 것은 조금도 헛된 일이 아니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시기 위하여 무언의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입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
하나님을 알되 창조주로서만이 아닌 구속주로서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성경은 하나님이 거짓된 한 무리의 신군으로 신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백한 특징과 증거들로써 우주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하신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참된 이해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모든 면에서 원만한 신앙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올바른 지식은 다 순종에서 나온다.
3. 성경을 떠나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만일 이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신속하게 달린다 하더라도 그 진로에서 탈선했기 때문에 목적지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의 실로 인도받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과 같은 것이라고 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지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일을 통하여 모든 백성을 자기에게 초청하신 일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다.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이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들 (요 4:22)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필연적으로 공허와 오류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확립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악랄한 거짓이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는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자기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신성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요 5:39).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슴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가장 유해한 오류가 현재 널리 유행하고 있다.
2.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다.
만일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벌써 그 권위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3. 어그스틴의 말을 반증으로 내세울 수 없다.
어그스틴은 경건한 자의 신앙이 교회에 권위 위에 세워진다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에 의존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증언이 불신자들을 재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확실성을 그들이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곧 하나님의 영으로 아직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어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 강하다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서 우리의 확신을 찾아야 한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음 말씀을 선지자들이 충성스럽게 선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다.
5. 성경은 자증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자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단정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인치시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지기까지는 그들을 일반대중이라는 말로 불러야 한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던 유대인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비밀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이를 이해할 수 없다(마 13:11).
제 8 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성경의 독특한 권위와 감동성 그리고 고전성, 1-4]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
성경은 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그 주제의 위엄의 의해 우리가 성경을 예찬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세련되지 못하고 소박한 표현의 단순성 그 자체가 어떤 웅변보다 더 존경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노력으로 얻게 되는 일체의 재능과 미덕을 훨씬 능가하는 이 성경은 신적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2. 결정적인 것은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다
건전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허식이 얼마나 허망하고 불쾌한 것이가를 알게 된다. 성경에 관한 한 완고한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을 헐뜯고자 해도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 가득 차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3. 성경의 고전성
성경의 고전성 그 자체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희랍의 저작자들이 애굽 신화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모세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것 외에는 종교의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4. 모세의 예증이 보여 주는 성경의 진실성
모세는 자기 조상이 전적으로 혐오의 대사이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였고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자기 지파 사람들이 틀림없이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들로부터 심한 미움까지 받게 될 것도 마다 않은 그였다.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아들들을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위치에 떨어뜨렸던가!
[이적과 예언에 대한 반대설을 논박함, 5-10]
5. 이적은 하나님의 사자에 권위를 강화시킨다
모세는 수많은 주목할 만한 이적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적들은 그가 말한 율법과 공포한 교리에 대한 확증이다. 이러한 이적들은 모세가 참된 선지자였다고 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6. 모세의 이적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어떤 마술이 백성들이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하늘에서 그렇게 충분한 만나를 내려오게 할 수 있겠으며 또 사람마다 그 날의 적량을 초과하였을 때에 그 만나를 부패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7. 예언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취된다.
모세는 희미하기는 하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한 바 있는데( 창 49:10) 이 예언은 그 후 2,000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이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였다는 명한 증거다.
8.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들을 성취하였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 왔고 심지어는 그들이 갈대아 사람의 동맹국이라 하여 스스로 안전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사야는 그 도시가 파괴되며 그 백성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예언하였다. 또한 들의 해방에 대해서도 동시에 예언하였다. 이 예언자가 그렇게 예언한 후로부터 고레스가 태어나가까지는 100년 이상 경과 하였다. 이 사실이야말로 그의 혀가 하나님의 영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9. 율법의 전승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적적으로 보존되었다. 손에서 손으로 그 후손에게 전승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10.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이적적으로 보존하셨다
우리는 주께서 오히려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자. 율법서와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의 교리, 곧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오시리라고 하신 그 교리를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하여 보존하셨던가. 그것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최대의 숙적인 유대인들이다. 그들 자신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을 우리가 읽도록 마련해 주었다.
11.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天的) 특성 및 그 권위
세 사람의 복음서 저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평범한 문체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하는 천적인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다. 이전에는 일반 대중에게 비천한 자로 멸시를 받던 그들이 갑자기 하늘나라의 신비를 장엄하게 강론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12-13]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성경이 공포된 이후 장구한 시대를 거쳐 사람들은 확고하게 또한 한결같이 성경에 순종하였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한 다른 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던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의 거룩한 일치에 의해서 성경은 그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많은 성도들이 일단 그 교리를 받아들이며 용감하고 대담 무쌍하게, 심지어는 큰 정열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도 주저하지 않았다. 성경의 위엄과 권위가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확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비방자의 간계에 대항해서도 훌륭하데 변호되었다. 그러나 성부께서 자신의 위엄을 성경에 나타내시며 성경의 존귀성을 모든 논쟁이 영역에서 지키시지 않는 한 그들 스스로 견고한 신앙을 마련하기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확신 위에 세워질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지식을 궁극적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려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 믿음이 아니고는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9 장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관심
2. 성령은 성경에 의해 인정된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제 10 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해서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모든 실들과 대조하고 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
2.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들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3.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교들에게도 계시되었으므로 우상 숭배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
제 11 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예배에서의 형상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1-4]
1. 하나님은 가시적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금하신다
2. 하나님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3. 신적 임재의 직접적인 표징도 형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4. 형상과 화상은 다같이 성경과 반대된다
[성경과 교부들의 주장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오류를 본박함, 5-7]
5. 우상에 대한 성경의 판단
6. 교회의 교리도 우상에 대하여 달리 판단한다
7.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물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과 에배 부패의 기원이 된다 8-16]
8. 형상의 기원: 유형적인 신격에 대한 인간의 욕구
9. 형상물의 사용은 마침내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다
10. 교회에서의 형상물 예배
11.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12. 예술의 기능과 한게
13. 교리가 순수하고 건전할 때에는 교회가 형상물을 거절하였다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오용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무서운 주장
제 12 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하나님만이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종교는 우리를 유일하신 하나님께 결속시킨다
2. 차이점 없는 구별
3. 형상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이다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예수님의 신성이 핵심]는 것을 가르친다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한 술어]
1.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3.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주는 말이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의미
[성자의 영원한 신격 7-13]
7. 말씀의 신격
8. 말씀의 영원성
9.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10. 영원하신 하나님의 천사
11.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사도들의 증거
12.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하여 입증된다
[성령의 영원한 신격 14-15]
14. 성령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15. 성령의 신격에 대한 명백한 증거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16-20]
16.하나님의 하나되심
17. 삼위
18.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이점
1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20. 삼위일체 하나님
[반 삼위이레 이단에 대한 논박 21-29]
21. 모든 이단의 근거: 모두에 대한 경고
22. 세르베투스의 반 삼위일체론
23.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성부만 지칭한 것이 아니다
25. 삼위는 공통적으로 신성을 소유한다
26. 성육신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예속된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28. 터둘리안을 인용하는 것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29. 교회의 인정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증하였다
제 14 장
우주와 만물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함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명백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세계와 인간의 창조 1-2]
1. 인간의 사색으로써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참뜻을 살필 수도 없고 또 살펴서도 안 된다
2. 6일간의 사역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 준다
[천사 3-12]
3.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다
[창조와 천사의 직능 4-12]
4. 우리는 천사에 대하여 사변에 빠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찾아 내야 한다
5. 성경에 나타난 천사의 명칭
6. 신자의 보호자이며 조력자인 천사
7. 수호 천사들
8. 천사의 계급과 수와 모양
9. 천사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다
10. 신적 영광은 천사들에게 속하지 않는다
11.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사용하시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사용하신다
12. 천사는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마귀 13-19]
13. 성경은 우리를 무장시켜 원수와 맞서게 한다
14. 사악의 영역
15. 화해할 수 없는 싸움
16. 마귀는 타락한 피조물이다
17. 마귀는 하나님의 권능하에 힜다
18. 승리의 확신
19. 마귀는 어떤 사상이 아니라 실재이다
[창조에 관한 영적 교훈 20-22]
20.창조의 위대함과 부요함
21.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22.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숙고할 때 절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신뢰가 우러난다
제 15 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초적 순결
[타락한 인간의 본성: 그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4]
1. 하나님은 인간을 순결하게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
2. 육체와 영혼의상이점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4. 하나님의 형상의 참 성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영혼 유출에 관한 마니교도의 오류
[ 아담의 타락에 비추어서 비판받는 철학자들의 영혼관 6-8]
6. 영혼과 그 기능
7. 근본적 기능으로서의 오성[지성]과 의지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제 16 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는 철학자들의 견해와는 상반된다 1-4]
1. 창조와 섭리는 분리될 수 없다
2. 운명이나 우연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만사를 지배하신다
4. 섭리의 성질
[성경이 입증하는 특별 섭리에 대한 교리 5-7]
5. 하나님 섭리는 또한 개개의 사건들을 지도하신다
6. 하나님의 섭리는 특별히 인간과 관계가 있다
7.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 발생 사건들도 조정한다
[운명 우연 우발성 8-9]
8. 섭리의 교리는 스토아 철학의 숙명론이 아니다
9.모든 사건의 참된 원인은 감추어져 있다
제 17 장
섭리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적용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과거와 미래에 관계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설명 1-5]
1. 하나님의 방법의 의미
2.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관찰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책임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4.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숙고와 조화된다
5.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악함을 무죄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편에 대한 명상: 섭리를 인지할 때 오는 복: 6-11]
6. 신자의 위안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
7. 하나님 섭리의 유효성
8.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모든 역경에서 우리를 돕는다
9. 중간 원인을 경시하지 않는다
1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우리는 비참한 존재이다
11.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든다
[반대자들에 대한 답변 12-14]
12. 하나님의 후회에 대하여
13.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고려하여 하나님의 후회를 말한다
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단호하게 실행하신다
제 18 장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사용하시며 저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모든 더러움에서 순결을 유지하신다
1. 단순한 허용이 아니다
2. 하나님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일을 추진하시는가
3. 하나님의 의지는 단일하다
4.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불경자의 행위를 사용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처음에는 율법으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 ||
인죄론 |
제 1 장 |
아담의 타락과 배반으로 인류 전체가 저주에 넘겨졌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원죄론 |
제 2 장 |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 | |
제 3 장 |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받을 일밖에 없다 | |
제 4 장 |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 |
제 5 장 |
자유 의지 옹호론자들이 보통 하는 항의를 논박한다 | |
성경론 |
제 6 장 |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구해야 한다 |
제 7 장 |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배양하시려는 것이었다 | |
제 8 장 |
도덕적 율법 십계명의 설명 | |
제 9 장 |
그리스도는 율법하의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졌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 |
제 10 장 |
신구약의 유사점 | |
제 11 장 |
신구약의 차이점 | |
중보의
사역 |
제 12 장 |
중보의 직책을 다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셔야 했다 |
제 13 장 |
그리스는 사람의 육신의 전정한 본질을 취하셨다 | |
제 14 장 |
중보의 두 본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 |
제 15 장 |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의 예언자의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세 가지 직책을 보아야 한다 | |
제 16 장 |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다하셨는가? 여기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도 논한다 | |
제 17 장 |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우리에게 얻어 주셨다고 하는 것은 정당한 주장이다 |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처음에는 율법으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제 1 장
아담의 타락과 배반으로 인류 전체가 저주에 넘겼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 원죄론
[우리 자신을 참으로 알면 자기 신뢰가 없어진다]2)
1. 자기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바른 지식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첫째로 창조시에 우리가 무엇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한 호의를 계속하시는가를 생각하는 데 있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불행하게 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을 알 떼에 우리의 모든 자랑과 자신이 사라지게 되며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하게 되고 수치심으로 위축 될 것이다. 시초의 우성을 생각할 때에 반드시 그것과 대조되는 우리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현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 사람의 본성은 망상적인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자존심이 골수에 박혀 있으며,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매혹적인 언사를 가장 기뻐한다.
3. 자기 인식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
하나님의 판단을 표준으로 하여 자기를 세밀히 검토하는 사람은 결코 용기와 자신을 품을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자기 성찰이 깊어 갈수록 더욱 낙심하며, 드리어는 일체의 자신을 빼앗기고 인생을 바르게 지도해 줄 것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인식을 분류해 보자. 첫째로 자기가 창조되며 귀한 천품을 받은 것은 무슨 목적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지식에 힘입어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내세 생명에 대하여 명상할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로 자기의 재능을 아니 재능의 결핍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간이 시초의 천품을 잃었고 인류 전체가 파멸하게 되었다, 4-7]
4. 아담이 타락한 이야기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창 3장): 배신,불충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였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바울도 이 점을 확인하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롬 5:19). 일단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을 멸시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을 버리게 된다. 그러니까 불충이 타락을 근본이었다. 그러나 그 이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 망덕과 함께 생겨났다.
5. 최초의 죄가 원죄이다.
아담이 그이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 멀어진 것은 영혼의 죽음이 되었다. 우주 전체에 편만한 저주는 아담의 죄에서 흘러 퍼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모든 후손에게 퍼지게 되었다. 하늘 형상이 아담에게 말소된 후에 이 벌을 받은 것은 후손까지도 끌어넣어 같은 불행에 잠기에 만든 것이다. 이것을 원죄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죄라는 말은 이전의 선하고 순수했던 본성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6. 원죄는 모방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시조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인간성의 뿌리였으며 따라서 그가 부패한 때에 인류가 당연히 부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면 아담은 우리를 자기의 멸망에 끌어넣어 자기와 함께 멸망하게 만들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은총으로 위를 다시 구원해 주신다(롬 5:9).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이 불행과 멸망을 당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본성까지도(엡 2:3 요 3:6)같은 파멸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7. 죄의 유전
아담이 그 받은 천품들을 잃었을 때에 자신만이 잃었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잃게 했다. 아담이 잃어버린 천품은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바은 것이며 그 천품은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주셨다는 말을 들을 때에 누가 영혼의 전이에 대해서 걱정할 것인가?
죄 있는 불신자든 죄 없는 신자든 사람은 썩은 본성에서 자녀를 낳기 때문에 무죄한 자녀가 아니라 유죄한 자녀를 낳는다. 죄책은 자연에서 오고 성결은 초자연적인 은총에서 온다.3)
[원죄는 본성이 부패한 것이며 벌을 받아야 하지만 창조된 본성에서 온 것은 아니라,8-11]
8. 원죄의 정체
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인 것 같으며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들고[최책] 다음에는 성경에(갈 5:19)육체의 일이라고 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죄의 열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로 우리의 본성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의와 결백과 순결 외에는 아무것도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당연한 정죄를 받고 있다.
둘째로 이 부패는 우리 안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전적으로 인간은 육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9. 죄는 인간 전체를 전복시킨다
아담이 의의 원천을 버린 후에 죄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점령했다. 저급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으며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신앙이 바른 지성이 보루를 점령했고 교만이 심정의 밑바닥에까지 침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우수성과 존귀성이 특히 빛이는 부분이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심히 부패하기까지 치료를 받으며 새로운 본성을 입어야 할 형편이다. 인간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 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야 한다.4)
10. 죄는 [처음]우리의 본성이 아니고 [타락후] 착란 상태이다.
우리는 우리가 멸망한 원인을 본성이 부패한 데 돌리는 것을 잊지 말고 본성의 창시자이신 하나님 그 분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멸망은 하나님이 원인이 아니라 우리의 육의 죄책이 그 원인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시초 상태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전 7:29]
1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성의 선천적 부패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부패했지만 본성에서 타락이 온 것은 아니다.
제 2 장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할 채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
1. 논제의 위험성들: 입장을 확립한다.
죄가 처음 인간을 노예로 만든 후 죄의 지배력은 모든 인류에 미쳤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영혼도 완전히 점령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노예 상태로 낮아진 후로 모든 자유를 빼앗겼는지 그리고 만일 자유가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그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5)
람에게 남아 있는 선은 전연 없으며 극히 비참한 궁핍이 사방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고 비록 그렇지만 없는 선을 추구하며 빼앗긴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빈곤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지혜와 덕성에 대한 인정을 전연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자유 의지론을 비판한다. 2-9]
2. 철학자들은 이해력의 힘을 믿는다.
3. 이와 같이 철학자들은 결국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
4. 교부들의 생각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의지의 자유를 인정했다.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5. 교부들이 생각한 의지와 자유는 여러 가지였다
6. 역사하는 은총과 협력하는 은총
7.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인이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자유 의지론을 확립하지 못한다
8. 어그스틴의 자유 의지론
9. 교부들 사이에 있는 진리의 음성들
[모든 자기 긍정을 버려야 한다. 10-11]
10. 자유 의지론은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을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11.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만 영예를 돌린다
[사람의 천품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오성,12-17]
12. 초자연적인 천품들은 소멸되었고 자연적인 천품들은 부패했지만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만한 이성은 남아 있다
13. 지상의 일과 인간 사회의 형태에 관한 오성의 능력
14. 학술과 기예에 관한 지성
15. 학술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16. 학예에 관한 인간의 재능도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
17. 12-16까지의 요약
[그러나 중생하지 않으면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18-21]
18. 우리의 오성의 한계
19. 요한복음 1:4-5로 사람들의 영적 맹목을 증명한다
20.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21.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
[죄와 무지를 동일시하는 플라톤을 부정한다. 그러나 죄는 미망에 의해 생길 수 있다, 22-25]
22.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증거를 가졌으므로 책임을 면할 수 없으나 그 증거에서 바른 지식을 얻지는 못한다
23. 임의로 선악을 판단할 때에는 그 판단은 분명한 것이 못된다
24.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관해서는 전연 무력하며, 둘째 돌판에 관계서는 결정적인 경우에 무력하다.
25. 우리가 그릇된 길에 들지 않게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에게는 선한 일을 결심할 힘이 없다,26-27]
26. 선한 것과 가한 것을 동등시하는 자연적인 본능은 자유와는 무관한다
27. 성령이 없이 우리의 의지는 선을 사모할 수가 없다
제 3 장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받을 일밖에 없다.
[사람의 본성은 심히 부패해 있으므로 전적으로 그 지성과 의지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 1-5]
1. 인간은 전적으로 육이다
2. 로마서 3장이 사람의 부패를 증언한다
3. 하나님의 은총은 정결하게 만들지 않고 다만 억제하는 때가
있다
4. 정직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성은
여전히 부패했다
5.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지만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
[의지의 전환은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주신 은총의 결과이다, 6-14]
6.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속 사업에서 나타나며 이것은 하난미께서 단독으로 행하시는 일이다
7. 신자가 은총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먼저 의지를 움직인다
8.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성경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한다
9. 우리의 축복의 시작과 계속과 결말이 하나님께로서만 온다는 것을 특히 성경에 있는 기도들이 밝힌다
10.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가 모두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첨가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 주신다
11. 견인은 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서 결코 우리의 어떤 행동에 대한 봉사이나 보충이 아니다
12.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사람은 단 한 가지 선행도 자기에게 돌릴 수 없다
13. 어그스틴도 사람의 의지가 독립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14. 어그스틴은 사람의 의지를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총에 의존시킨다
제 4 장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
[사람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해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하신다고 한다, 1-5]
1. 사람은 악마의 세력하에 있으며, 참으로 기꺼이 그를 따른다
2. 같은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역사한다
3. 마음이 굳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4. 성경에서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대하시는 실례
5. 사탄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외형적인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뜻을 이긴다. 6-8]
6.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행동에서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
7.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지배하신다
8. 자유 의지라는 문제는 우리가 결심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 결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제 5 장
자유 의지 옹호론자들이 보통 하는 항의를 논박한다
[상식적인 근거 위에 선 자유 의지 옹호론에 대답한다, 1-5]
1. 첫째 논법: 필연적인 죄는 죄가 아니며 자원적인 죄는 필할 수 있다
2. 둘째 논법: 상벌의 의미가 없어진다
3. 셋째 논법: 선악의 구별이 전폐될 것이다
4. 넷째 논법: 모든 충고가 무의할 것이다
5. 충고의 의미
[성경에 있는 율법과 약속과 책망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한 자유 의지 옹호론에 대답한다, 6-11]
6. 하나님의 교훈들은 우리의 능력의 척도인가
7. 율법 자체가 은총을 얻는 길을 가리킨다
8. 우리는 은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가지 계명이 밝힌다
9. 회개는 하나님과 사람이 나눠서 하는 일이 아니다
10. 성경의 약속들은 의지의 자유를 전제한다고 논적들은 생각한다
11. 의지자 자유롭지 못하다면 성경에 있는 책망들은 무의미하게 된다고 그들은 항의한다
[성경의 특수한 구절들과 사건들을 근거로 한 논법에 대답한다, 12-19]
12. 신명기 30:11 이하
13. 하나님이 사람들의 행동을 기다리신다는 것은 자유 의지를 전제한다는 주장
14. 그러면 이 행위들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가
15. 행위는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의 것이요 하나님이 고무하셨으니 하나님의 것이다
16. 창세기 4:7
17. 로마서 9:16과 고린도전서 3:9
18. 집회서 15:14-17
19. 누가복음 10:30
제 6 장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해야 한다
[중보를 통해서 본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시다,1-2]
1. 중보만이 타락한 인간을 도우신다
2. 옛 언약까지도 중보가 없으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다고 선언한다
[언약의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필수적이다, 3-4]
3. 구약의 믿음과 소망은 약속에 근거한다
4.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제 7 장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배양하시려는 것이었다
[도덕적이며 의시적인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1. 중보는 타락한 사람만을 돕는다
2. 율법에는 약속이 포함되었다
[우리는 도덕적 율법을 완수할 수 없다, 3-5]
3. 율법은 우리를 변명할 수 없게 만들어 절망 상태에 빠뜨린다
4. 그러나 율법의 약속은 무의미하지 않다
5. 우리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알리며 거울과 같이 우리의 죄 많음을 밝히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도록 인도한다. 6-8]
6. 율법은 엄격해서 우리의 모든 자기 기만을 빼앗는다
7. 율법의 정죄 기능은 그 가치를 떨어뜰리지 않는다
8. 율법의 정죄 기능이 신자와 불신자에게 미치는 영향
9. 어그스틴의 말과 같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함으로써 은총을 구하게 만든다
[율법은 행악자들과 불신자들을 억제한다. 10-11]
10. 율법은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
11. 율법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을 억제한다
[율법은 주로 신자들을 훈계해서 선행을 촉구한다. 12-13]
12. 신자들도 율법이 필요하다
13. 신자를 위해서 율법을 전폐하려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율법의 이른바 철폐는 양심의 해방과 고대 의식들의 폐지에 관련된 일이다, 14-17]
14. 신자들에게는 율법이 어느 정도로 철폐되었는가?
15. 율법은 이제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16. 의식적 율법
17.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가 도말된다
제 8 장
도덕적 율법(십계명)의 설명
[기록된 도덕적 율법은 자연법을 표병한 것이다, 1-2]
1. 십계명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2. 율법에는 용서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자비하시며 절대로 성결하시며 인자하게 복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 율법에서 배운다 3-5]
3. 율법이 엄격한 데는 적극적인 목표가 있다
4. 약속과 위협
5. 율법의 충족성
[도덕적 율법은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영적으로 이해하며 해석해야 한다, 6-10]
6. 율법은 하나님의 율법이므로 우리에게 전적인 요구를 한다
7. 그리스도께서 친히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회복하셨다
8. 바른 뜻을 아는 방법
9. 명령과 금지
10. 율법은 강력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더욱 미워하도록 한다
[율법의 두 판돠 계명들의 바른 배당, 11-12]
11. 두 판
12. 계명들을 두 판에 배정함
[개개의 계명에 대한 자세한 해설, 13-15]
13. 머리말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14.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15.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16. 첫째 계명
17.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
18. 둘째 계명에 있는 위협의 말씀
19.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이르게 하거니와
20. 조상의 죄에 대한 벌이 후손에게 미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모순되지 않는가
21.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22. 이 계명의 해석
23. 맹세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임
24. 거짓된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목독이다
25. 불필요한 맹세
26. 산상수훈은 이런 맹세를 금지하지 않는가?
27. 그러므로 율법에 없는 맹세는 물론 용인된다
28. 전체적인 해석
29. 안식일 계명은 약속이다
30. 제칠일
31. 안식일 계명의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다
32. 넷째 계명은 어느 정도까지 외명적 규정을 초월하는가
33. 무슨 까닭에 일요일을 지키는다
34. 성일의 영적 준수
35. 이 계명의 범위가 넓다
36. 명령
37. 약속
38. 위협
39. 이 계명의 뜻
40. 이 계명의 근거
41. 전체적인 해석
42. 독신주의는 옳은가
43. 이 계명과 결혼과의 관계
44. 정숙과 정조
45. 전체적인 해석
46. 이 계명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돌볼 의무를 우리에게 지운다
47. 전체적인 해석
48. 이웃의 명예
49. 이 계명의 뜻
50. 깊은 마음속의 의
[율법의 원칙들을 그리스도의 교훈에 비추어 본다, 51-59]
51. 율법의 요약
52. 성경이 가끔 둘째 판만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53. 믿음과 사랑
54. 이웃에 대한 사랑
55.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56. 복음적 권고인가
57. 원수를 사랑하는 계명은 참된 계명이다
58. 대죄와 소죄의 구별은 타당하지 않다
59. 죄는 모두 대죄다
제 9 장
그리스도는 율법하의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예상되었고 계시되었다,1-2]
1. 신약 사회의 유리한 점
2. 복음은 계시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한 오류들을 논박한다: 세례 요한의 중간적 위치, 3-5]
3. 약속들이 우리에게 파기된 것이 아니다
4. 율법과 복음과의 반대점을 과장하지 말라
5. 세례 요한
제 10 장
신구약의 유사점
[ 구약의 언약은 신약이 언약과 실지는 같다. 1-6]
1. 문제
2. 중요한 일치점들
3. 구약은 장래를 내다본다
4. 구약에서도 의롭다 함은 오직 은총에서 그 타당성을 얻었다
5. 언약의 표징들이 같다
6. 요한복음 6:49, 54을 근거로 한 항의를 반박한다
[영생의 소망에 관한 논증: 구약의 조상들은 약속의 실현을 내세에서 구했음을 밝힌다, 7-14]
7. 조상들에게는 말씀이 있었다. 따라서 영생이 있었다
8.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기와 사귀게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9.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인애가 죽음보다 강하였다
10. 고대인들의 축복은 지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11. 아브라함의 믿음
12. 이삭과 야곱의 믿음
13. 족상들은 영생을 구했다
14. 성도들의 죽음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다윗과 욥과 에스겔과 기타 인물들을 이용해서 이 논의를 계속한다, 15-22]
15. 다윗이 희망을 선포한다
16. 내세에 적용되는 다른 귀절들
17. 경건자들의 소망은 현세의 재난을 초월하여 내세를 바라본다
18. 그들의 행복한 운명을 악인들의 운명과 대조시킴
19. 영생 불사의 증인인 욥
20. 영생에 대한 예언자들의 증언
21. 에스겔서에 있는 마른 뼈의 골짜기
22. 다른 예언서들에서 인용한 구절들
23. 요약과 결론: 신구약은 영생 문제에서 일치한다
제 11 장
신구약의 차이점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다섯 가지이다: 첫째로 구약은 영적 축복을 현세적 축복으로 표현했다, 1-3]
1. 지상의 복리를 역설했으니 그것은 하늘 일을 생각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2. 지상적 약속은 구약 교회의 유년기에 해당했고 지상적인 것에 소망을 국한한 것이 아니다
3. 신체적인 혜택과 신체적인 벌은 예표다
[ 둘째 차이점: 구약 시대에는 형상과 의식으로 진상을 전하며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4-6)
4. 이 차이의 의미
5. 교회의 유년기와 성장기
6. 믿음의 위인들도 옛 언약의 범위냉 국한되어 있었다
[셋째 차이점: 구약은 문자적이요 신약은 영적이다, 7-8]
7. 이 차이의 성경적 근원과 의미
8. 고린도후서 3장에 의해서 차이점을 상론한다
[넷째 차이점: 구약의 노예 상태와 신약의 자유, 9-10]
9. 바울의 가르침
10. 율법과 복음
[다섯째 차이점: 구약은 한 민족에 신약은 모든 민족에 관계한다 11-12]
11. 그리스도 안에서는 장벽이 무너진다
12. 이방인들을 부르심
[이와 같이 처리 방법이 다른 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와 일관성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대답함 13-14]
13. 대체로 무슨 까닭에 차이가 있는 것인가
14. 모든 사람을 뜻대로 다루시는 하나님의 자유
제 12 장
중보의 직책을 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셔야 했다
[중보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 되셔야 한 이유들, 1-3]
1.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깊고 먼 거리를 연결할 수 있었다
2. 중보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어셔야 한다
3.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만이 우리 대신에 복종할 수 있었다
[이 교리에 대한 반대론에 대답한다.4-7]
4.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5.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그리스도는 역시 사람이 되셨을까?
6. 하나님의 형상데 대한 오시안더의 주장
7. 오시안더의 논점들을 일일이 반박한다
제 13 장
그리스도는 사람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취하셨다
[고대 이단설에 관련에서 멘노 시몬스에게 대답함 1-2]
1.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을 증명함
2.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에 반대하는 자들을 논박함
[그리스도는 인간의 후손이며 참인간성을 가지셨다, 3-4]
3. 처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선조: 불합리한 생각을 포록함
4. 참사람이지만 죄가 없으시고 참사람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제 14 장
중보의 두 본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설명함 1-3]
1. 이중성과 통일성
2. 신성과 인성의 상호 관계
3. 중보의 위격의 통일성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와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배척함, 4-8]
4. 두 본성의 융합 또는 분리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5.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다
6.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7. 세르베투스의 천박한 반증
8.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반박함
제 15 장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기 위하여서는 무어보다도 그의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3 가지 직책을 보아야 한다
[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 3 가지: 첫째 예언자로서의 직책 1-2]
1.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책에 대한 성구들
2. 우리에게 대한 그 예언자적 직책의 의미
[왕으로서의 직책과 그 영적 성격 3-5]
3.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원성
영원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회 전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각 교인에 관한 것이다.
교회가 확실히 영속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격렬한 동요를 끊임없이 고통하며 무섭고 비참한 폭풍들이 무순한 재난을 위협하는 가운데도 여전히 안전하다. 악마는 세계의 총력을 동원하더라도 교회를 전복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보좌를 토대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6)
우리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똑같은 영원성에서 우리는 영감을 받아 축복된 영생 불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개인적: 교회가 영원 무궁하시다. 우리 왕이신 예수님이 영원하시기 그의 백성도 영원하시다.
4.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직책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
5. 그리스도의 왕위의 영적인 성격: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주권
[제사장직: 화해와 중보 6]
6. 그리스도의 화해와 중보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 제사장 역할을 했다
예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제 16 장[중보의 다른 각도: 전생애를 보면서, 사도신경의 순서에 따라]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다하셨는가? 여기는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도 논한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멀어진 우리: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얻었다, 1-4]
1. 구속자
지금까지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가 한 말은 오직 한 가지 목표로 향해야 한다. 원래 정죄를 받아 죽고 멸망한 우리는 의와 해방과 생명과 구원을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중보자는 뜻이다. 왕 제사장 선지자는 중보의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의 핵심은 중보자이다. 16장에서 전생애가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다. 예수의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전생애를 보내셨다. 예수의 이름을 풀면 모든 사역이 우리 모든 구원을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진노를 알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감사하게 된다
3.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그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보다 앞선다
4. 속죄 사업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유래한다: 전자가 후자의 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종과 죽음의 결과, 5-7]
5. 그리스도는 평생을 복종으로 일관하셨고 그 복종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의 복종 생활 전체에 의하여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이라이트 생애 전체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결정적인 순간이다. 전체는 생애 한 번에 말하면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태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해방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더욱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유한 특색이라고 한다[예수님의 전생의 순종이 우리의 구원 아담의 순종과 비교학기 우리의 의는 전생애, 형벌 제함은 십자가, 그 자격은 참사람(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온전한 모델이 예수님 천사가 만약 하면 우리 모델이 될 수 없다. 앞으로 우리도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참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빌라도 앞에서: 죄인을 대신해서 심판받음
6. 십자가에 못박히사
하나님의 저주받는 죽음 죄인의 죽음의 성격이 진노의 성격 하나님의 심판의 고통은 지옥에 들어가는 고통이다.
7. 죽으시고 묻히시며
[지옥 강하의 교리를 설명함 8-12]
8. 지옥에 내려가사[신조 고백]
그러나 우리는 지옥 강하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귀중하고 유용한 신비가 거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고통이, 지옥의 쓴 잔을 받은 것과 같다. 겟세마네 엘리엘리라막사막다니 신앙의 유익 때문에 중요하다. 지옥의 경험을 이 땅에 맛보셨다. 주님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다. [육체의 고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고난이다. 우리의 신앙의 유익이 위해서 들어간 신조 고백이 낫다.
9. 그리스도는 지하 세계에 가셨는가
10. 지옥강하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받으신 정신적 고통을 의미한다
11. 성경 구절로 이 설명을 변호함
12. 오해와 오류에 대해서 이 교리를 옹호함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늘에 정좌하심 13-16]
1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죽음을 정복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위한 죽음이며 앞으로 우리 부활에 대한 보증
14. 하늘에 오르사
15.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
16.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의 믿음에 주는 혜택
드디어 왕으로서 통치, 지상에서 계셨을 때도 왕이시만 우편 보좌에 시작
적용: 우리에게는 낙원에 가는 길이 막혔는데 곧 우리의 길이 열어놓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기에 권위 능력을 믿으면서 주 앞에 복종할 수 있는 근거
[그리스도는 앞으로 심판하러 오심 17]
1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신경에 대한 결론: 그리스도의 충족성 18-19]
18. 심판자가 구속자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놀라운 위로가 생긴다. 우리를 심판하실 이가 자기와 함께 심판하는 영예를 나눠 주시기로 이미 결정하실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기 때문이다[우리의 신랑 동행자 구속주이기 때문에 위로가 된다]
19. 신경의 모든 조항에 홀로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신다]
그리스도 안에 각종 선한 것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다른 데로 갈 것이 아니라 이 원천에서 마음껏 마셔야 한다. 그리스도만 만족해야 한다.
제 17 장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우리에게 얻어 주셨다고 하는 것은 정당한 주장이다
1. 그리스도의 공로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배제하지 않고 그 은총에 앞설 뿐이다
2. 성경은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연결한다
3. 성경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공로
4. 그리스도가 대신하심
5.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대가이다
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공로를 얻으신 것이 아니다
3권 성령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 ||
|
제 1 장 |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
|
제 2 장 |
믿음: 그 정의와 속성에 대한 설명 |
|
제 3 장 |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회개 |
|
제 4 장 |
복음의 순수성과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 고해와 만족설(보속설)을 논함 |
|
제 5 장 |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
|
제 6 장 |
그리스도인의생활: 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역설하는가 |
|
제 7 장 |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자기 부정 |
|
제 8 장 |
십자가를 지는 것: 자기 부정의 일부 |
|
제 9 장 |
내세의 명상 |
|
제 10 장 |
현세 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
|
제 11 장 |
믿음에 의한 칭의: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
|
제 12 장 |
우리는 하나님의 거주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
|
제 13 장 |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
|
제 14 장 |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
|
제 15 장 |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
|
제 16 장 |
이 교리를 겨냥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에 대한 반박 |
|
제 17 장 |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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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장 |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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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장 |
그리스도인의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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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장 |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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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 장 |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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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장 |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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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장 |
이 교리를 겨냥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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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장 |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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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장 |
최후의 부활 |
제 3 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 1 장[성령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이루어놓으신 구원을 전달해 주시는 성령의 전달,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신랑을 잘 만나면 신랑의 지위 소유는 아내에게 온다. 모든 복은 예수님과 연합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해 주신 것을 적용시켜 주신다. 예수님의 구원을 송두리째 주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1.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시는 띠로서의 성령7)
우리는 [독생자에게 주신] 그 유익들을 어떻게 받는가?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계셔야 하며 그에게 접붙임을 받아야 하며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이것을 얻는다. 우리는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시는 띠는 성령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또 무슨 이유로 성령을 받으셨는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시지만 아들에게 특히 성령을 아주 충만하게 주셨다.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를 나눠주는 수종자와 청지기로 삼으셨다. 그래서 ①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며 ② [아들이 보내신]아들의 영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실 영의 선물들을 맡아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목 마른 사람들이 모두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라고 곧 살려주는 영으로서(고전 15:45) 하늘에서 파견된 분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 4:7) 각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 ③성령을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른다
3.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칭호8)
① 양자의 영: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그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을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기도할 말까지고 알려주시고 우리가 대담하게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하신다( 롬 8:15; 갈 4:6)
② 보증이며 인: 성령께서는 하늘로터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로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고후 1:22; 엡 1:14)
③ 생명: 성령께서는 의로 말미암는 생명이라고 한다(롬 8:10).
④ [샘]물: 성령께서는 은밀한 중에 물을 주어 위리의 의의 싹을 돋게 하신다. 그 물로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게 하신다. 모든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는 근원이시다.
⑤ 기름[부음]: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시냇물같이 부으시고 생기를 회복하며 강하게 키우신다
⑥ 불: 성령께서는 우리의 육욕을 태워버리시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열렬한 헌신의 불길을 일으키신다(눅 3:16).
⑦ 주의 손: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행사하시기 때문이다(행 11:21)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 성령님에 의해서 머리되신 예수님께 [영적, 신비적] 연결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살 중의 살이 되며 뼈 중의 뼈가 된다(엡 5:30).
⑧ 진리의 영: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들을 모두 생각나게 하시며 하늘 나라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열쇠이시다[요 14:17; 계 3:17)
4.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표현하는 말들은 대체로 믿음과 관련이 있다. 성령께서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우리를 복음의 광명으로 인도하기기 때문이다(요 1:12-13).
제 2 장 [신앙론-성령님에 의해서]
믿음: 그 정의와 속성에 대한 설명
1.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율법으로 정하셨다. 율법을 일자 일획에 이르기까지 지킨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영원한 죽음을 당할 처지에서 우리를 구출할 수 있는 해방된 수단은 다만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구속자 즉 해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여기 첨가해야 할 것이 있다. 즉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에 있다.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멀리 숨어 계실 것이다(요 8:2; 14:6; 17:3, 시 36:9; 고후 4:6)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가 되며 사람으로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되신다. 목적지와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서 발견될 뿐이다.
[신앙은 지식을 내포한다. 스콜라의 맹신이라는 사고는 찬된 교리를 흐리게 한다, 2-5]
2.믿음의 근거는 지식이지 경건한 무지가 아니다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고 지식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의 뜻까지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시며 그리스도를 의와 성결과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이 지식에 의해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감정을 위임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3.로마 교회의 맹신이라는 교리는 근본적으로 틀렸다
소위 겸손한 태도를 가진 무지를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지 교회(로마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4.바른 믿음도 항상 오류와 불신앙에 둘러싸인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때에 그들은 이와 같은 맹신의 분명한 본보기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증거하셨음으로 이 때에[주의 부활을 꿈꾸듯 느낌, 글로바의 엠마오 귀향]에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은 보고 그의 말씀이 참말인 것을 스스로 발견한 후에 드디어 믿었다고 했다. 그 때에 처음으로 믿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아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신앙에는 항상 불신앙이 섞여 있다.
5.예비 신앙으로서의 맹신
[말씀에 대한 믿음의 관계: 믿음의 요약된 정의,6-7]
복음의 교훈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면서도 기적에만 놀라서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이 많았다. 이 공경하는 태도를 신앙이라는 훌륭한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시초 불과했다 아직 초보적 지식은 없을지라고 듣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신자라고 불리웠다.
6.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믿음과 말씀 사이에 항구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을 태양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다(요 20:31). 믿음을 지탱하며 유지하는 근거는 말씀이며 말씀에서 떠난 믿음은 넘어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하면 믿음은 조금도 남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도움을 사용하시든지 또는 자신의 힘만으로 하시든지간에 자신에게로 끌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복음에 대한 순종이라( 롬 1:5)고 정의한다.
7.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믿음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들은 믿음을 세우지 못하고 그 자체만으로 믿음을 흔들 뿐이다(창 2:17). 하나님의 뜻을 조금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더라도 그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신다면 그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믿음이란 말에 대한 여러 가지 용납할 수 없는 정의들 8-10]
8.내실적 신앙과 형식적 신앙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기초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을 경건한 성향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9.고린도전서 13:2 내실적 신앙과 형식적 신앙의 차이를 증명한다
10.형식적 신앙은 환상에 불과하다f
마술사 시몬도 믿었다고 하지만( 행 8:13) 그는 조금 후에 불신앙을 드러냈다(행 8:18). 마귀들도 믿고 떠는 일들을(약 2:9) 듣고 이해한다고 하나 우둔하여서 마귀들보다도 열등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든간에 결국은 공포와 절망에 빠지고 만다는 점에서 마귀들과 같다.
11.버림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는가
버림받은 사람들도 때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거의 같은 감동을 가지며, 그들 자신의 생각으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전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 행 13:48). 그러므로 사도가 그들도 하늘의 은사를 맛본다고 한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그들도 잠시 동안 믿는다고 하신 것은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인 은혜의 힘과 믿음의 확실한 빛을 굳게 잡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께서 그들의 죄를 더욱 명백하게 하며 변명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에 잠입하여 양자로 삼은 영은 받지 못하더라고 주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혼돈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그것의 견고한 실체보다 그림자를 잡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그들을 참으로 죽음에서 구출해 그의 보호 하에 두시지는 않고 다만 임시로 자비를 보이실 뿐이다[셋째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믿음의 산 뿌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셔서 그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해 주신다(마 24:13).
12.진정한 믿음과 거짓된 믿음
요약하면, 첫사람의 반역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마음과 영혼에서 말살된 것같이 하나님께서 사악한 사람들을 은총의 빛으로 비추시다가 후에 빛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씨에 대해서는 선택된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며 그 씨를 영원히 썩지 않게 만들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을 거짓되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잠시라도 빛춤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한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대한 신념이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로서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응답하지 아니하고 고용인같이 행동한다9)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면서 그들에게 대해서 이상하게도 분노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였으며 사라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산 뿌리를 박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다(마 15:13).
13.믿음이란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훈, 어떤 특수한 대상에 국한시킴-백부장의 믿음, 기적을 행하는 믿음
[7절에 있는 믿음의 정의에 내포된 것을 자세히 검토함: 지식의 요소, 14-15]
14. 고상한 지식으로서의 믿음
우리가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우리가 인간의 감각적인 지각으로 아는 사물들에 대해서 아는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는 지식이나 이해와는 다르다. 요한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요한은 신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고 언급한다. 또 그들은 확실히 이 일을 안다. 믿음의 지식은 이해가 아니고 확신이다.
15. 믿음은 확실성을 내포한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권하실 때마다 간접적으로 우리의 불신앙을 책망하신다. 우리의 심정에서 사악한 의혹을 일체 근절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믿음에서 확신이 나온다고 하며 확신에서 담력이 생긴다고 한다.
[믿음의 확실성과 두려움과의 관계, 16-28]
16. 믿음의 확실성
17. 시험과 싸울 때의 믿음
18.신자의 내심에 있는 갈등
19.약한 믿음도 함 믿음이다
20.믿음의 약점과 강점
21.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방패이다
22.옳은 두려움
23.두려움과 떨림
24.믿음의 확실성이 확고 부동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때문이다
25.믿음의 두 면에 대하여 베르나르드가 한 말
26.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을 공경함
27.자녀의 두려움과 종의 두려움
28.믿음이 확약하는 것은 지상의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믿음의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값 없이 주신다는 약속인데 이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29-32]
29.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을 지탱한다
30.믿음이 은혜에 대한 약속만을 토대로 삼는 이유
31.믿음에 대하여 말씀이 가지는 의의
32.믿음의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실편되었다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신된다, 33-37]
33.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에 효과를 나타낸다
34.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35.사람은 성령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36.마음의 문제로서의 믿음
37.의심은 믿음을 질식시키지 못한다
[여기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의 항의를 논박함 38-40]
38. 믿음의 확신에 관한 스콜라 철학자의 오류
39.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주를 기뻐한다
40. 우리가 끝까지 견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확실치 못하다는 생각
[믿음과 소망 및 사랑과의 관계, 41-43]
41. 히브리서 11:1에 있는 믿음
42. 믿음과 소망은 서로 연결된다
43.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동일한 토대 위에 섰다
제 3 장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회개
[회개는 믿음의 결과이다. 이 점에 관한 몇 가지 오류를 고찰함 1-4]
1. 믿음의 결과로서의 회개
2. 회개의 근거는 복음에 있으며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3. 죽음과 살림
4. 율법 아래서의 회개와 복음 아래서의 회개
[회개를 정의함: 그 요소들인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림을 설명함 5-9]
5. 정의
6.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
7.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생긴다.
8. 죽임과 살림은 회개의 구성 부분이다
9.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
[신자들은 성활을 체험하지만 현세 세상에서는 죄 없는 완전성을 체험하지 못한다 1-15]
10. 신자들은 여전히 죄인이다
[[ 칭의 11-18]]
11. 신자들 속에서 죄는 지배력을 잃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다
12. 타고난 부패는 무슨 뜻인가
13. 신자들이 여전히 죄인인 데 대한 어그스틴의 증언
14. 완전성이라는 환상에 반대함
15. 고린도후서 7:11에 있는 회개
[회개의 열매: 거룩한 생활 죄의 고백과 용서 평생 계속하는 회개 16-20]
16. 외면적인 회개와 내명적인 회개
17. 회개의 외면적 실천이 주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18.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19. 회개와 용서는 서로 관련이 있다
20. 어떤 의미에서 회개는 용서의 선행 조건인가
[회개해도 소용 없고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죄들 21-25]
22. 용서할 수 없는 죄
23. 두 번째 회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24.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은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25. 가짜 회개와 진짜 회개
제 4 장
복음의 순수성과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 고해와 만족설(보속설)을 논함
[고백과 통회에 관한 스콜라 교리와 그 성경적 근거를 검토함 1-6]
1. 회개에 관한 스콜라 교리
2. 회개에 관한 스콜라 교리는 양심을 괴롭힌다
3. 죄인의 통회가 아니라 주의 자비가 기다리고 있다
4. 고백하라는 명령은 없다: 깨끗함을 받은 나환자들에 대한 스콜라파의 은유적 추리를 반박함
5. 나사로를 풀어준 것을 곡해한다
6. 성경적인 고백
[비밀 고백은 후대에 생겼다는 증거 7-8]
7. 고대 교회에는 의무적인 고백이 없었다
8.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고백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죄의 고백: 공적 및 사적 고백 9-13]
9. 하나님 앞에서 고백함
10.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함
11.온 회중이 죄를 고백함
12. 영혼의 치료와 사적 고백
13. 원망을 제거하기 위한 사적 고백
[열쇠의 권한과 죄의 사명 14-15]
14. 열쇠의 권한: 그 성격과 가치
15. 고백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요점
[가톨릭 교도들의 오류들을 그리고 고백과 보속에 관련된 유해한 관습을 비팒함]
16.모든 죄를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7. 완전한 고통을 요구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준다
18. 완전하 고백을 요구한 데서 오는 악 영향
19. 비밀 고백을 비평함
20. 열쇠의 권한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21. 사제가 매고 푸는 것을 불확실하다
22. 열쇠의 권한을 그릇되게 쓰는 것과 바르게 쓰는 것과의 차이
23. 그릇된 주자을 폭로함
24. 요약
25. 가톨릭교의 교리를 개관하며 논박함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속을 제공하며 양심에 평화를 준다 26-27]
26. 그리스도는 완전한 보속을 제공하셨다
27. 로마 교회의 교리는 그리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하며 양심이 확신을 일소한다
[여러 차이점과 반대 의견을 비판적으로 검토함 28-30]
28. 소죄와 대죄
29. 죄가 용서되면 벌도 면제된다
30. 그리스도의 특별 희생만이 벌과 죄책을 제거할 수 있다
31. 그릇된 해석을 폭로함: 하나님의 심판에는 처벌적인 것과 교정적인 것이 있다
32. 하나님의 보복의 심판과 징계의 심판은 목적이 전연 다르다
33. 보복의 심판은 벌하기 위한 것이며 징계의 심판은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34.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신자는 낙망하지 말라
35. 다윗이 받은 벌
36. 벌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선행
37. 죄인이었던 여인
38. 로마 교회 교리는 교부들의 권위를 근거로 삼을 수 없다
39. 스콜라 학자들은 교부들의 교훈을 부패시킨다
제 5 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
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행독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전하지 않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연옥설을 반박함: 연옥설 지지용으로 인용된 구절들을 해석함 6-10]
6. 연옥설은 논박할 필요가 있다
7. 복음에 연옥을 증명하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8. 빌립보서와 계시록과 마카비후서에서
9.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결정적인 구절
10.초대 교회에 호소하는 것도 로마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 6 장
그리스도인의생활: 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역설하는가
1. 이 논설의 골자
2.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동기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가장 강렬한 동기를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구속 행위에서 얻는다
4.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혀의 문제가 아니고 가장 깊은 마음의 문제이다
5.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불완전과 노력
제 7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자기 부정
[탈속과 자기 부정의 기독교 철학: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1-3]
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하였다
2. 하나님께 헌심함으로써 자기를 부정함
3. 디도서 2장에 나타난 자기 부정
[우리와 이웃 관계에서의 자기 부정의 원칙 4-7]
4. 자기 부정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한다
5. 자기 부정은 이웃을 돕는 태도를 바르게 한다
6. 이웃에 대한 사람은 사람의 종류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만을 우러러본다
7. 보이는 사랑만으로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의향이다
[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자기 부정의 원칙 8-9]
8.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정은 그의 뜻에 대한 헌신이다
9.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을 의지하라
10. 자기 부정은 역경을 견디는 힘을 준다
제 8 장
십자가를 지는 것: 자기 부정의 일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각각 십자가를 져야 한다 1-2]
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2.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믿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가르치기 위하여 필요하다 3-6]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실을 경험하는 기회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준다
4. 십자가는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킨다
5. 십자가는 약이다
6. 십자가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징벌이다
[박해와 기타 재난에서 십자가를 짐 7-8]
7.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음
8. 십자가 밑에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는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나 스토아적으로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9-11]
9. 스토아 사상가와 달라서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슬픔을 밖으로 나타낸다
10. 현실의 슬픔과 현실의 인내는 서로 충돌한다
11. 인내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와 기독교적인 견해
제 9 장
내세의 명상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현세에 대한 과도한 애착에서 멀어지게 하신다 1-2]
1. 허무한 현세 생활
2. 우리는 현세 생활의 허무성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무상하고 불완전한 현세 생활을 바르게 평가하면 내세를 명상하게 된다 3-6]
3. 지상 생활을 감사함
4. 영생에 대한 올바른 동경
5.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배격함
6. 내세에 대한 열망은 신자에게 위로를 마련해 준다
제 10 장
현세 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현세 생활에서 좋은 사물은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여 즐겨 사용하라 1-2]
1. 두 가지 위험: 잘못된 엄격한 금욕과 잘못된 방종
2. 대원칙
[우리는 하늘로부터 받은 이런 각종 은혜를 무절제하게 사용하거나 재리를 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명을 따라 충실히 섬겨야 한다 3-6]
3. 선물을 주신 이를 우러러보면 옹졸한 생각과 방종을 막을 수 있다
4. 영생을 갈망하는 것도 우리의 외면적 생활을 바르게 결정한다
5. 검소와 위탁물인 지상 소유에 대하여
6. 주의 부르심이 우리의 생활 양식의 기초임
제 11 장
믿음에 의한 칭의: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칭의와 중생: 용어를 정의함 1-4]
1. 칭의의 교리 그 위치와 의미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는 우리가 신앙으로 그를 붙잡고 소유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기독론]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주로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신앙론]. 첫째로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 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칭의론].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성화론]. 이 두 가지 선물 중의 둘째인 중생에 대해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 말했다. 칭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보다 가볍게 논했다. 왜냐하면 먼저 믿음은 선행을 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편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2. 칭의의 개념
3. 성경에 있는 용법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 5-12]
5.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
6.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동한다
7.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
8.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된다는 오시안더의 주장
9. 칭의은 중보가 하시는 일
10.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다
1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
12. 오시안더를 논박함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 13-20]
13.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
14.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
15. 은혜와 선생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
16.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데 대한 성경의 판단
17.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
18. 칭의는 해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19. 믿음만으로
20. 율법의 행위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 21-23]
21.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
22.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게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
23.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
제 12 장
우리는 하나님의 거주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에 칭의를 논함 1-3]
1.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
3. 진정한 의의 증인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 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4-8]
4.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 기만이 없어진다
5. 모든 자기 찬양을 버려라
6.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
7.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
8.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 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
제 13 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고 게시는 그의 공의에 도움이 된다
2.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
3. 자기의 의를 보아서는 양심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
4.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
5.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
제 14 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도 나누인다
2.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3.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
4. 그리스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살 수 없다
[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를 받는다 7-8]
7.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8. 사람과 행위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9-11]
9. 또 진정한 신자들도 가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항의와 성자들의 잉여 공로설을 검토 반박함 12-21]
12. 반대자들의 핑게
13. 잉여 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의 가혹함과 죄의 중대성을 오해하였다
14.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더라고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또 완수할 수도 없다
15. 우리와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잉여 업적은 있을 수 없다
16. 행위를 믿거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
17. 행위는 결코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18. 그러나 선생을 보면 믿음이 강화될 수 있다
19. 행위는 소명의 결과이다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신자들의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21. 간혹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제 15 장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어그스틴과 베르나르도도 반대한다 1-4]
1. 잘못된 물음과 참된 물음
2.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
3. 선행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
4. 반증에 대답함
[사람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치하는 데 반대함 5-8]
5.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기초이며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
6. 로마 교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소멸한다
7. 로마 교회의 신학은 어거스틴이나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8. 바른 교리를 기초로 한 충고와 위로
제 16 장
이 교리를 겨냥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에 대한 반박
1. 칭의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
2. 칭의의 교리는 선행에 대한 열성을 억누르는가
3.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비가 행동의 동기가 된다: 행위는 종속적인 것이다
4. 칭의의 교리는 죄인을 선동한다
제 17 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율법에 관련된 행위: 고넬료의 예 1-5]
1. 스콜라 논법을 서술하고 논박함
2. 우리는 행위로 율법의 약속을 실현시킬 수 없다
3. 율법의 약속들은 복음을 통해서 실현된다
4.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중으로 용납을 받는다
5.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의 선행을 기뻐하시는가
[칭의의 행위에 연결시키는 구절들을 검토함 6-15]
6. 옛 언약에 있는 은혜의 약속과 율법에 있는 약속은 다르다
7. 성경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를 말하지 않는가
8.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는 이중의 가치가 있다
9. 이신 칭의는 행위에 의한 의의 기초가 된다
10. 죄가 용서된 후에는 행위가 용납된다
11. 야고보는 바울에 반대하는가
12. 의롭다함이란 말을 야고보는 바울과는 다른 뜻으로 쓴다
13. 로마서 2:13
14.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위에 호소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15. 신자들은 완전한가
제 18 장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보상을 말하는 구절들은 행위를 구원의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1-4]
1. 행한대로 갚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2. 보상은 기업이다
3. 은혜로서의 보상
4. 보상을 약속하시는 목적
[이 견해에 대한 반대론들에 대답함 5-10]
5. 보상의 근거는 용서이다
6. 하늘에 쌓는 보물에 대하여
7. 환난을 참으면 보상이 있는가
8. 사랑에 의한 칭의
9. 마태복음 19:17
10. 의와 불의는 같은 척도로 서로 비교할 수 없다
제 19 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교리는 필요하며 이 자유에 포함된 세 부분 중에서 첫 부분은 갈라디아서 1-3장에 있다]
1. 자유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3. 갈라디아서에 있는 논증
[둘째는 율법의 강요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4-6]
4. 율법의 강요에서 해방되는 것이 신자들의 진정한 순종을 확립한다
5. 강요에서 해방됨으로써 우리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된다
6. 은혜로 인하여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남은 죄를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
[무해 무익한 일들로부터의 자유: 로마서에 의한 증명 7-9]
7.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셋째 부분
8. 하나님의 선물을 그의 목적을 위해서 쓰는 이유
9.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탐식과 사치에 악용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약한 형제들과의 관계: 또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문제 10-13]
10.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해하는 것은 불가하다
11. 넘어지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12.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바르게 행사하며 바르게 포기하는데 대하여
13. 이웃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전통과 정부에 대한 양심과의 관계 14-16]
14. 인간의 모든 법에 대하여 양심은 자유롭다
15. 두 개의 나라
16. 양심의 구속과 자유
제 20 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기도의 본질과 가치 1-3]
하나님은 모든 은택을 하나님이 주신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받는다.
1. 믿음과 기도
2. 기도의 필요성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본 보화를 기도로 파내신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도함으로써 기원한다. 믿음의 실천으로 기도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체가 기도[신뢰 의지]한다. 기도 안 하면 하나님 없이도 된다는 말이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만 받는다. 모든 필요의 원천이다. 우리 인간 전체가 의지. 간난 아이의 특징은 부모를 의지한다. 예수님을 안 믿는 특징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실용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는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모든 것이 나온다.
3. 반대 의견: 기도는 없어도 되지 않는가? 기도해야 하는 여섯 가지 이유
하나님께서 기도를 명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이다. 기도하는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 듯하기 위해서다.[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기도 안 하면 욕망이 일어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감사하면 기도한다.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넷째로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기도 응답하면 더 체험해지니까]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기뻐하면서 즐거워 하기 위해서다]
끝으로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서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예민하게 깨닫는 사람은 섭리의 오묘함을 알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결코 졸거나 게으른 일이 없으시면서 게으른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잠자며 게으르신 것 같은 인상을 주시는 때가 많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우리가 그 분을 찾으며 그 분께 간구해서 큰 유익을 얻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에게로 가게 한다.
[올바른 기도의 법칙 4-16]
새벽기도 안 하면 아침에 하라 특징 규칙을 정해서 하지 말라 그 방법이 아니라 그 마음 태도와 자세가 중요하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어떤 마음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시집와서 시어머니가 나오는 자세는 어머니와는 다르다. 친구가 부르는 것과 장군이 부르시는 시간이 다르다
[첫째 법칙: 경외 4-5]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는 경외감이다. 규칙이 아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하나님을 인식하라.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다.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십시오 이렇게 천박하게 하지 말라. 통성기도는 경외하는가? 내 편에 열심히 아니라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가? 어렵게 느껴지는가?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아갔는가? 신하가 왕에게 나아갈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아갔는가? 두려움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아버지로서 나아가야 한다. 친밀감 신뢰감 기대의 법칙을 가지고 가야 한다
4. 하나님과의 대화에는 경건한 초자연성이 필요하다
5. 무례하며 불경한 기도를 배척함-성령님이 올바른 기도를 도우신다
[둘째 법칙: 진심으로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6-7]
우리는 부족한 것밖에 없다. 왜 다 하나님이 주셔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거지같은 심정 곧 하나님이 안 주시면 할 수 없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약함과 연약함을 알아야 한다.
6. 필요성을 느끼면 모든 비현실성이 배제된다
7. 기도가 우리의 일시적 기분에 좌우되는 때가 있는가
[셋째 법칙: 자기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라 8-10]
우리는 날마나 범죄한 자이다. 하나님 앞에 죄짓는 자다. 부족함과 악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 죄악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죄악된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필요가 없으면 안 하거나 우리 필요만 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아는 지식은 결국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와의 자세와 태도이다
8. 우리는 겸손하게 자비를 빌기 위하여 기도한다
9.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10. 자기의 의를 말할 것인가
[넷째 법칙: 확신 있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라 11-14]
하나님의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경외감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거룩과 친밀함이다. 기도의 법칙은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인식하고 나아가라
11. 소망과 믿음은 공포심을 극복한다-기도와 믿음
12. 기도가 허락된다는 확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반박함
13.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기도의 원동력이 된다
14.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 무서워 떨 것은 아니나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기도도 들어주신다 15-16]
15. 사악한 기도를 들으신다
16. 하나님의 용서가 있어야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된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 17-20]
왜 그리스도가 다루는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잇는 분은 중보자 그리스도 반드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근거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기도 응답도 그리스도 때문이기에 그만큼 중요하다.
17.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
나의 기도가 나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이다. 하나님과 기도 응답의 근거는 예수님에 달렸기 때문이다.
18.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19. 그리스도께서는 신자 상호간에 있어서도 중보자이시다
다른 형제 중보는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아간다. 결국 예수님 때문에 상달이 되는 것이다. 내 공로가 아니다. 열심히 생활할수록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나아간다. 기도할 때에 늘 연약함 죄악을 생각날 때마다 예수님 때문이다. 이 정도 사는 것도 예수님 때문이다. 이 중보 기도는 예수님 때문이다. 기도는 예수님과 뗄 수 없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불변한 중보자이시다
3중 직분: 제사장 중보 문제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그리스도 외에는 가능하지 않다. 다 그리스도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의 은혜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그 휘장 안에 지성소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감 휘장은 히브리서 찢어진 육체 사이에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육체의 휘장을 뚫고 나가간다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그릇된 교리를 배척함 21-27]
21.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중보의 영광을 빼앗는다
22. 성자(聖者) 숭배
23. 성자들의 중보 기도를 지지하려고 성경 해석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24. 죽은 성자들은 지상의 근심 걱정에 관계하지 않는다
25. 족장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적당하지 않다
26.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듯이 성자들도 기도했다
27.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교리를 결론적으로 논박함
[기도의 종류: 사기도와 공기도]
28.사기도
29.공기도의 필요성과 위험성
30.하나님의 성전은 교회 건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노래와 일상 언어를 사용하는 문제 31-33]
31. 기도 중에 말하며 노래하는 문제에 대하여
기도 중에 쓰이는 말과 노래는 심령의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입술이나 목에서만 나오는 것이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다. 이런 짓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성을 조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의례적으로 할 때가 많다. 내면적으로 깊어져야 하는데 공기도에는 자칫하면 공적 언어가 되기 쉽다. 의례적인 것을 조심해야 한다]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진노하게 한다. 찬송 개인 찬송을 부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인식과 우리의 인식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찬송과 기도는 함께 가야 한다. 기도는 자기 영성의 바닥이 나는데 찬양은 그렇지 못한다. 외형적인 데에 관심이 많다
32.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
그러나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 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리와 고백이 찬송 가사에 담겨져 있었다. 설교 핵심이 놓여져 있었다.
33. 기도는 일상 용어로 드리라
[주기도문: 처음 세 기원에 대한 해설 34-43]
34.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이 된다
35. 구분과 중요한 내용
3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7. 우리 아버지: 이 호칭 형식은 우리를 고무할 것이다
38. 우리 아버지: 이 호칭 형식은 우리와 교우들과의 친교를 확립한다
39. 기도와 자선을 비교함
4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41. 첫째 기원
42. 둘째 기원
43. 셋째 기원-첫째 부분의 결론
[마지막 세 기원의 해설 44-47]
44. 넷째 기원
45. 다섯째 기원
46. 여섯째 기원
47. 결론
[결론적 고찰: 주기도의 완전성과 다른 말을 쓰는 자유에 대하여 48-49]
48. 주기도는 지켜야 할 표준
49. 우리는 주기도의 용어보다 내용을 지켜야 한다
[특정 시간에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게속 기도하는 데 대하여 50-52]
50. 일정한 시간에 기도함(기도의 형식)
우리의 약함 때문에 규칙적인 기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기도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잘 안 된다. 규칙적인 기도 시간이 필요하다. 효험이 많은 것이 아니다. 고정적인 시간은 새벽기도 시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 시간 이전에 정해내야 기도할 수 있다. 우리의 자세와 훈련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정한 시간을 떼어나야 한다. 구약 신약 성도들은 경건한 성도들은 하루 3번 했다. 하루 세 번 정도 기도를 했다. 다니엘도 기도하였다. 경건한 믿음의 선배들은 이어 받았다. 조나단 에드워드로 기도했다. 우리가 약하다 보니 늘 하루 생활 기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1. 기도는 참으면서 계속하라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다. 기도할 때에야 말로 인내하는 것이다. 한 번의 욱하는 열정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서 기도 응답한다. 끈질기게 기도하라
52. 응답이 없는 기도가 있는가
제 21 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예정의 교리는 중요하므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 1-4]
예정을 왜 만들었을까? 불공평 비난 받기 위한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는데, 예정을 왜 다르고 어떤 문맥에서 다루어야 하는가? 신론에 들어가야 하는데 구원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정론을 구원론 속에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색적으로 추상적으로 할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 반응이 나타난다. 복음이 지나는 곳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 왜 그럴까? 그 성경적 대답이다. 복음 전파의 문맥 속에서 보아야 한다. 복음 전파의 결과 그리고 나는 마음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돌같은 두더지 같은 사람들이다.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내 편에서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도록 택해서, 에베소서 등의 성경 구절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받고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거절하는가? 가장 신앙에 유익한다
1.예정론의 필요성과 그 유익: 호기심의 위험성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끼게 한다: 나의 구원은 만세전부터 사랑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뿌리가 만세 전부터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까지 간다. 예정론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낀다. 창세전부터 시작하셨다. 영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이 예정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다. 우리를 가장 겸손하게 만든다. 결국 이 모든 구원이 하나님에게 오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손들고 나왔는데 집에 가다가 손을 내린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행동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졌기에 구원의 확신 앞으로 영원토록 확신하다. 제일 큰 유익을 준다
2.예정의 교리는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지 아니하는 부분은 호기심으로 캐내려고 하지 말라!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이미 다소 곤란한 것인데 사람의 호기심 때문에 심히 복잡하게 되고 위험하게 되기도 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금지된 샛길을 방황하며 높은 곳으로 돌입한다.[성경에 말하고 하지 않는 부분도 해명] 그래도 버려두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며 해명하려고 한다. 이런 염치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그들에게 이 점에 관한 그들의 의무와 한도를 깨우쳐 주어야 하겠다.
3. 둘째 위험성: 선택의 교리에 대해 침묵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예정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성경이 가르쳐 준 것만큼 알아야 한다. 이것도 양극단이다.
4.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첫째로 예정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이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성경에서 찾으면 된다.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어야 한다. 사색으로 하지 말고 성경이 말하는 부분에까지만 하면 된다. 칼빈의 예정론의 근거는 성경 구절이다.
둘째로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며 여기서는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셋째로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은 탐색해서는 안 되는 동시에 공개하신 것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편으로 과도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은혜를 모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다.
어그스틴이 예정론의 중요한 것을 잘 준비해 놓았다. 바울이 말한 것을 어그스틴이 그리고 칼빈이 말하였다. 성경에 있는 교리다.
[이스라엘 백성과 각 개인에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며 설명함 5-7]
5.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이스라엘의 선택
예정론의 핵심: 믿음의 근거는 우리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다. 우리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에게 있다. 이신칭의도 오직 복음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 이성으로는 답변하기 힘들다.
예정의 정의: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각 사람에게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이중예정]
예수믿는 사람들은 영생 안 믿는 사람들은 영멸[교부들은 한 쪽만을 이야기 했다. 칼빈은 분명하게 했다]
질문: 왜 나는 구원 못 받는가? 답: 토기장이에게 권한이 있다. 그 뒤에는 모른다. 왜 그런가는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 우리편의 결정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 왜 조선 시대에 태어나지 않는가? 우리 행위에 있지 않다. 성경의 증거를
6. 둘째 단계 : 이스라엘 백성 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
리브가 뱃속에 있던 야곱과 에서: 선택은 행위 때문이 아니다
7. 실제적인 선택으로서의 개인의 선택-선택교리의 요약
부르심으로 선택: 믿도록 하시면 성령님이 한 종류의 사람에게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선택
말씀을 전하고 선택된 백성을 성령님이 부르신다. 예정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예수님을 믿으니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관계가 되기 때문에 예정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24:2]
제 22 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서 온다 1-6]
1. 선택과 공로에 대한 예지
2. 창세 전의 선택은 공로의 예지와 관계가 없다
3. 선택하신 것은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지 거룩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4. 로마서 9-11장과 유사 구절들
5.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해위를 근거로 삼는 주장을 반박한다
6. 야곱이 선택된 목적은 지상의 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선택과 유기의 이 근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함 7-11]
7. 선택에 관한 그리스도의 증거
8.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교부들의(특히 어거스틴) 생각
9. 사람의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가 선택과 연결되는 것은 거저 주시는 은혜가 바로 이런 공로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10. 하나님의 부르심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
11. 제외되는 것도 해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생기는 일이다
제 23 장
이 교리를 겨냥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 유기는 선택에 동반되며 하나님의 뜻으로 하시는 일이다 1-3]
1. 선택은 있어도 유기는 없는가
[첫째 반대론: 선택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2-3]
2. 하나님의 뜻이 의의 표준이다
3.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 공정하시다
[하나님의 공의의는 우리의 힐문을 받지 않는다 4-7]
4.하나님의 결정은 그의 공의에도 숨겨져 있다
5. 하나님의 숨은 결정은 찾아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공손하게 찬탄해야 한다
6.둘째 반대로 선택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한다
7.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도 예정하셨다
[아담의 타락과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는 하나님이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결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이를 공으로 하셨다 8-11]
8.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은 서로 다르지 않다
9. 둘째 반론에 대한 반박을 요약함
10. 셋째 반대론: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이 편파적이라는 견해가 된다
11.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의
[예정을 선포하는 것은 유해하지 않고 도리어 유익하다 12-14]
12. 넷째 반대론: 선택교리는 고결하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한다
13. 다섯째 반대론: 선택 교리는 모든 충골르 무의미하게 만든다
14. 어그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바르게 선포하는데 있어서 모범을 보였다
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선택된 자들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가입된다 1-5]
1.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따라서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2. 부르시는 방법은 부르심이 은혜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준다
부르심의 성격과 적용까지도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한다.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의한 조명이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반드시 말씀전파와 성령의 조명이기에 전도해야 된다. 성경은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신 방법에 대해서는 말씀전파를 통해서 부르셨기 때문에 오도록 하기 때문에 돌아온다. 돌아오는 방법은 말씀 전파와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예정론을 전한 바울은 전도에 열심을 했다. 듣도록 전도했다. 오늘날도 선택된 사람이 돌아오는 방법은 가서 전해야 한다. 선택된 자를 부르시는 방법은 말씀 전파와 성령의 조명이다.
3.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4.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는 바른 방법과 그른 방법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릇된 곳에서 선택을 탐구하겠다는 악한 소원을 일으킨다. 예정이 안 되었다면 열정이 소용이 없다. 잘못된 방법으로 예정 받았음을 확인하게 되면 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확인의 방법은
예정에 대한 논의를 험한 바다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고의로 위험한 곳에 뛰어 들지만 않는다면 그 바다를 건너는 뱃길은 안전하고 평온하며 심지어 상쾌하다고도 하겠다. 자기들의 선택을 더욱 확신하려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그의 말씀과 별도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심연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선택을 바르고 합당하게 검토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위로의 열매를 거둔다. 그러므로 우리의 탐구 방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출발점과 종점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조명으로 믿고 싶은 신앙이 생김=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는 것=택함의 증거].
믿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주셨기 때문이다. 기히하다 어떻게 내가 이런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니 감사할 뿐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나를 봐서도 안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보라 택함의 증거다
5.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같은 자비하심과 인자하신 마음을 찾으려면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지식이 믿음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것이 가장 큰 증거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의 보증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도 선택의 보증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 거울이며 우리가 이렇게 보는 데는 아무런 자기 기만도 없는 것이다.
신기한 체험들이 우리 선택의 기준이 아니다. 자기 속에 유일한 것이 내게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어도 신기한 체험은 체험할 수 있다. 믿음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증거가 선택받은 증거다. 이것이 구원의 영원한 확신이 된다. 선택은 영원한 견인과 연결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보호 하에서 선택된 자들의 견인은 확실하다: 반대론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해석함 6-11]
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선택이 불변 영속하다는 확신을 주신다
아무도 빼앗을 갈 자가 없다.
7. 참으로 믿는 사람은 탈락하지 않는다
탈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다.
8. 일반적인 소명과 개별적인 소명 마 22:2하
9. 유다의 예는 반대 증거가 되지 않는다
10. 선택된 사람들이 아직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상태: 선택의 씨는 없다
11. 씨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12-17]
12. 버림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처리
13. 말씀의 선포가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14. 마음이 강퍅해지는 원인
15. 여기에서 말한 주장을 반박하는 듯한 구절: (가) 에스겔 33:11
16. (나) 디모데전서 2:3-4 기타 유사한 구절들
17. 다른 반대론들에 대답함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음 나는 안다. 사변으로 임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이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제 25 장 구원의 완성: 몸의 부활
종말론 구원에 끝에 있다.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 약했다. 신학은 도전에 응전이기에 시대의 영적인 것을 대항함, 이 당시에 응전은 구원론 교회론에 관심사였다. 우리는 곧 임박, 재림에 할애가 많이 되는 게 오늘의 현상이다.
최후의 부활
[최후의 부활 교리를 주장함 1-4]
1. 부활의 소망: 이 소망의 중요성과 이 소망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
태산 같은 불행히 우리를 거의 압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세의 복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지나가는 그림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속 인간들은 우리를 조롱한다. 끝으로 우리의 상하 전후에는 무서운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땅 위의 일들에서 해방시켜 멀리 있는 하늘 생활에 붙들어 매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올바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현실에는 불행이 있고 불신사회에서 조롱 유혹이 있는데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 내세 명상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종말로 일어날 일을 확실히 알고 지금 끌어서 사는 것이다. 사도바울 영광을 보지만 강 바다 산적 감옥 먹지 못함 등의 어려움 속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부활과 영광을 알기에 현재에 살아가는 것이다. 미래의 상황을 끌어서 사용하는 삶이다. 가장 유익하기에 몸의 부활을 생각해야 한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최후 상태의 기대감이 오늘 이기게 한다. 우리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몸의 부활은 확실하다. 유혹과 핍박도 이길 수 있다. 타락한 시대일수록 땅 육체 정욕에 힘쓴다.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올라가도록 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높이 하늘로 향하여 끌어올리는 것이다.
구약은 약속 신약은 성취 그러나 맛보기에 불가하다. 최후의 완성된 몸의 부활은 맛보기에 불가하다. 늘 깊은 지식이 중요하다. 최후의 상태는 완전한 연합 온전히 알게 되는 상태를 이야기 한다.
우리의 목표: 지식이 완전하게 되는 시점이 몸의 부활 곧 영광스러운 때이다. 마지막 상태를 열망하는 상태이다. 우리의 마음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라고 살아가야 한다.
2.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힘을 준다
3. 바라는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몸의 부활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불신자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현재 가지고 있는 몸의 부활이 중요하다. 사도신경에 끝에 몸의 부활을 믿는다.
4. 몸의 부활의 근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부활은 확실하다. 이미 부활하신 분이 그 근거 또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썩고 없는데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 첫 창조하신 분에게는 부활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종 반대론자들의 반대론을 논박함 5-9]
5. 이교들의 반대론을 장례로 반박함 천년왕국론자들의 오류
6.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그뿐 아니라 호기심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두 가지 망상을 제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전인이 죽는 것같이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의 불멸을 인정하면서 영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리라고 주장하였다. 즉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병적인 호기심: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나? 영혼은 불멸한다. 영혼이 떠나서 그리스도께 간다. 성경 구절이 많다. 내 영혼을 받아주시고 스데반도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영혼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우가 없다[당시에는 영혼도 함께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영혼은 불멸 몸은 다른 것으로 부활한다: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한다.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등의 문제로 공연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모르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이다.
중간기에 영혼에 대한 호기심은 낭비밖에 없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은 말하지 말라 창조 천사 예정은 다 모른다. 스데반이 영혼으로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는 모른다. 천사의 결혼 문제에 허비하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모르고 사변에 치우치기 쉽다. 아브라함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정도로 믿고 살아야 한다.
7. 현세에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함
어떤 사람들은 영혼은 현재 입고 있는 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다름 몸을 받는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이것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극심한 오류 중의 하나다.
또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있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하리란 것을 무엇보다도 가르친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교의 화장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매장은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 매장하라는 말이 아니라 매장은 부활을 믿었다는 증거이다. 사실은 재림하실 때에 화장을 부활하지 안 하나 결국 해체되기는 마찬가지다. 땅이 부족해서 교회에서 압장서서 이것을 한다.
죽기 이전의 상태가 신령한 부활을 한다. 주님의 부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님 죽으실 때 예루살렘에 무덤에서 있는 자들이 살아났다. 앞으로 주님의 재림에는 이와같이 한다.
8. 몸을 존중하는 장례의 의미-부활의 모양
이제 남은 것은 부활의 모양에 대해서 다소의 암시는 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이것을 비밀이라고 부르고(고전 15:51), 우리가 절제하며 너무 자유롭고 미묘한 사색을 하지 않도록 당부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본체로 모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로 바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다만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다른 특성에 있어서는 탁월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먹기도 하지고 동시에 나타시기도 하지만 지나친 호기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영혼은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에 따르면 낙원에 이르게 된다. 한쪽에 달린 그 사형수의 영혼이 낙원에 이른다고 하셨다.
낙원에서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안식,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부활하기 전까지는 영혼은?
9. 불신자의 부활
[사람의 내세 생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즐거움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소원해진 영원한 불행 10-12]
10. 영원한 복
새하늘과 새 땅의 정보는 제한적이다. 그 내세는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다. 감미로운 것들을 바라보게 하며 영벌에 대해서 경계심을 갖도록 기록이 되어 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 영적인 복을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언사로 대강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우리에게 강렬한 소원을 일으키므로,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잠깐 새각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이 명상에서 상당히 전진했으나 우리의 영적 능력을 이 신비의 높이에 비교할 때 우리는 아직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침착해야 하며, 우리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대담하게 솟아 올라 하늘 영광의 광채에 압도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천국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내가 가본 천국은 실제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을 말도 못하고 말해도 듣지 못한다. 보여주어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천국 갔다왔다는 것은 우리를 혼돈스럽게 만든다.
11. 무용한 질문들을 처리함: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것 사색을 면해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증명하기 때문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 동성으로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방해가 되는 난문들을 피하여 정해진 한계를 넘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무익한 문제들을 공연히 연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문제에 대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박한 행동을 조장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12. 버림받은 자들의 처치
하나님께서는 한 번 보시는 것으로 모든 죽을 인생을 흩으시며 멸망시키시지만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려하시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겁이 많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그들에게 더욱 용기를 주셔서 계속 전진하게 하신다(시 90:7 하). 하나님의 만유의 주로서 만유 위에 계시게 되는 날까지 전진을 계속하게 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포괄적으로 했다.
제 4 권 하나님께선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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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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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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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그 선정과 직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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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고대의 교회 상태, 교황제도 이전의 교회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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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
전체적인 교황 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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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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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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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는 임으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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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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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장 |
입법권: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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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 제도에서의 그것을 남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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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
교회의 권징: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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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장 |
맹세: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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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
성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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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장 |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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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장 |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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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장 |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것이 우리에게 주슨 유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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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장 |
가톨릭교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말삻하는 모독 행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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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장 |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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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장 |
국가 통치 |
제 4 권
하나님께선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
새로운 개혁교회에서의 근거 가톨릭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만들어졌다. 3가족 루터파 칼빈파(개혁파) 성공회 주류는 개혁교회다. 교회주의 교회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어머니인 거룩한 보편적 교회 1-4]
성경론의 안경론, 교회론은 어머니론,사람다운 사람으로! 타락한 우리 구원 칭의 화친 새생명은 우리 안에, 개인의 신앙 생활을 바르게 세워주기 위해서 교회를 주셨다. 양육이 교회가 하는 일이다. 교회에 소속이 되어야 한다. 외적인 은혜의 방편이 양육이다.
1. 교회의 필요성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전진시키려면 무지하고 태만한 우리들에게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에 대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도 첨가하셨다... 그러면 나는 먼저 교회를 논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 아이일 동안 교회의 도움과 봉살로 양육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성인이 되고 드리어는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신앙이 성장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한다. 교회에 남아 있으면 성장하게 된다. 붙으만 있으면 대부분 자라게 된다. 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교회가 다른 곳에 관심을 둘 수 있다.
2. 교회의 신경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3. 성도가 서로 교통함
4. 신자의 어머니로서의 가견적 교회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자들을 멸시하지 말라 5-6]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말씀인데 이 말씀을 전하는 직분자이다. 진리를 배우는 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말씀 사역자들을 중요하게 본다.
(엡 4:10-13)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순간에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즉 하늘 교리를 전파하라고 목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모든 사람을 동일한 규정 하에 두셔서 모든 사람이 온유하고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이 일을 위해서 임명된 교사들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 이 일은 이중으로 유익한데, 한 편으로는 우리가 목사의 말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같이 들을 때 이것을 아주 좋은 수단으로 삼아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또 한 편으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하셔서 친히 우리를 향하여 우레같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도망할 것이므로 사람인 해석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음성이 들리게 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광신자들을 말씀 사역자들을 무시한다. 재침례파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가지게 된다. 교회다움은 모든 성도들에게 달려 있지만 말씀 사역자들에게 달려 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 맞으면 개척하나 진정한 교회인가 참 교회는 무엇으로 구별하는가?
5.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그 의무
6. 성직의 의미와 한도
[가견적 교회: 그 회원과 표지 7-9]
7. 불가견적 교회와 가견적 교회
우리는 성경에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하나님 눈에만 보이는 교회=불가견 교회].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는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산재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때가 많다[현재 지상의 교회는 지역교회].
눈에 보이는 가견교회는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 가견 교회에 있으면서도 불가견 교회에 소속된 사람이 있다. 가견 교회에 있으면서 실제로는 교회가 아니다. 가견 교회는 항상 불가견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견 교회가 어머니 교회다. 비록 불신자들이 들어와도 어머니 역할을 한다.
어머니 역할을 누가 하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직분자는 가견 교회의 어머니 역할이다.
8. 우리 판단의 한계
9. 교회의 표징 그 적용
[이런 표지가 있는 교회는 아무리 결함이 있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 분열의 죄 10-16]
10. 교회의 표지와 권위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를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통일교는 교회가 아니다. 정명석은 교회가 아니다. 교리가 바르게 설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단은 교회가 아니다. 자기들은 성경이라고 하지만 교리가 바르게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함에 있다. 사람의 수가 많은 게 아니라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신실하게 잘 선포하느냐 잘못된 근본적 교리는 이단이 된다.
우선 교리: 삼위일체 양성론
차선 교리: 침례 분파라고 한다. 이단과 교파는 말씀의 신실성이 있다.
가톨릭은 교리가 잘못 성례도 엉터리로 한다.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 가톨릭은 외형적 제도는 내려왔지만 동일한 말씀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거부했다. 우리가 초대 교회의 그 신앙을 입고 있다. 개혁교회의 분리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11. 표지의 절대적인 타당성
12. 표지에 유의하면 경솔한 분리를 막을 수 잇다
13. 교회 내의 불상사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14.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15. 악인들과의 교제
16. 완전을 자칭함은 그릇된 결과다
[교회가 완전히 거룩하지 못한 것은 분열의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고 도리어 교회 내에서 죄의 용서를 실천한 기회를 준다 17-22]
17.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
18. 예언자들의 선례
19.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선례
20. 죄의 용서와 교회
21. 교회원들에 대한 용서는 영속한다
[신자의 공동체 내에서 죄를 용서한 실례들 23-29]
22. 열쇠의 권한
23. 모든 신자는 자기의 죄가 용서되기를 구해야 한다
24. 옛 언약 하에서 죄많은 산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율법
25. 옛 언하 하에서 죄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예언서
26. 새 언약 하에서 죄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27. 타락한 교회들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28. 무의식적인 죄만 용서를 받는가
29. 고대 교회에 있었던 두 번째 회개의 문제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비교
[바른 교히와 바른 예배에서 떠난 로마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자격이 없다 1-6]
1. 근본적인 구별
2. 로마 교회와 그 주장
3. 거짓 교회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4.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5. 분파와 이단이라는 비난에 대답한다
그런데 그들은[가톨릭] 우리에게 분파와 이단의 죄를 뒤집어 씌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그들과 다른 교리를 선포하며 따로 기도도 집회를 갖고 세례를 베풀며 성만찬과 기타 거룩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비난이지만 길고 어려운 변호가 필요하지는 않다. 논쟁을 일으켜 교회와의 교통을 끊는 사람들을 이단자 또는 분리론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교통을 유지하는 유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다. 이러므로 어그스틴은 이단과 분파를 구별해서 이단자들은 그릇된 교리로 건전한 믿음을 부패하게 만들지만 분리론자들은[분파] 간혹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교제를 끊는 것이라고 한다.
교리가 일치하지 않음: 이단 분파 교리는 같지만 교제가 끊어짐
이런 기준을 보니 가톨릭은 교회가 아니다.
6.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것이 연합의 조건이다
[예배와 재판권에 관해서 로마 교회와 고대 이스라엘을 비교한다 7-11]
7. 로마 교회의 상태는 여로보암 때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8.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했으나 그들의 교회는 남았다
9. 가톨릭 교회는 부패했으며 배격되어야 한다
10. 왜 부패한 교회를 떠나야 하는가
극단적 재침례파와 같은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 교리와 같으면 분리해서는 안 된다. 재침례파는 자기가 확정해서 분리해 나가서는 안 된다. 재침례파 제도적 가톨릭 교회를 분별해 나가며 논파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죄인들에게 징계를 해야 한다. 지금 교회가 권징, 쫓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실패하였다.
11. 교황 제도 하에 남아 잇는 교회의 흔적
12. 건전한 요소가 있을지라도 부패한 교회가 참교회가 될 수는 없다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그 선정과 직분
[하나님이 주신 직분: 이 기능은 고귀하고 꼭 필요하다 1-3]
1.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2. 교회를 위한 성직의 의의
3. 복음 선포의 직책은 특히 중요하다
[성경에 있는 직분들을 설명한다 4-9]
목사 장로 집사를 주셨다. 가견교회의 질서 시스템 정치제도를 주셨다. 칼빈의 시스템은 최초였다. 동방정교회는 일인독재이다. 전 유럽에 번져서 개혁교회가 생겼다. 교회 정치 직분 문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 사역자들에게 대한 권위다.
우리의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개혁된 교회가 계속해서 개혁해 나가야 한다.
4. 에베소서 4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직분
5. 임시직과 항존직
6. 사도들과 목사들
7. 목사는 자기 교회에 매여 있다
8. 말씀을 전하는 직분: 장로
9. 집사
[사역자들의 소명과 위임과 안수 10-16]
10. 소명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11.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
12. 누가 어떻게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13. 누가 가역자들을 택할 것인가
14. 사람을 통해서
15. 평신도의 투표
16. 임명
제 4 장
고대의 교회 상태, 교황제도 이전의 교회 정치
[사역의 역사적 발전: 사역자의 세 분류: 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들, 그 중에서 선택된 한 사람의 감독 대감독 1-4]
1. 고대 교회는 성경에 있는 원형에 충실했다
2. 감독의 지위
3. 감독과 장로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
4. 대감독과 총대감독
[집사와 부감독: 재산과 구제 물자의 관리: 하부 성직자 5-9]
5. 집사의 직분
6. 교회 재산의 운용
7. 수입을 넷으로 나누었다
8. 교회 재산을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9. 직분들의 준비 단계
[사역자의 선택 및 임명의 변천사: 집권자들과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찬성으로 감독을 선택한다 10-15]
10. 주로 바울의 지시대로: 평신도들의 찬성
11. 감독 선거에 대한 찬성: 데로도레트 시대까지
12. 평신도와 성직자의 균형
13. 성직자들과 통치자들
14. 임직 절차
15. 대감독에 의한 성별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 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평신도의 투표 없이 무자격자를 임명했다 1-3]
1. 감독직에 필요한 자격을 무시했다
2. 주교 선거의 권리를 신자의 공동체에서 박탈했다
3. 태만한 결과로 통치자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성직록 수여에 관례된 폐해 4-7]
4. 사제와 부제를 임명하는 데 관한 폐해
5. 임명식은 가짜
6. 성직록의 정체
7. 해괴한 악폐
[성직을 가진 수도사와 참사회 의원과 기타 인물들의 무성의와 나태 8-10]
8. 사제가 된 수도사들
9. 성직록을 받는 사제들과 고용살이르 하는 사제들
10. 여러 가지 성직자들의 겉치례
[주교와 목사와 부제들의 부패와 탐욕 11-19]
11.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
12. 이 폐단의 초기: 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두스
13. 선전과 현실
14. 사제들의 도덕 수준
15. 부제
16. 교회 수입의 분배
17. 교회의 참 광채와 거짓 광채
18. 교회 재산의 부정한 사용과 정직한 사용
19. 성직자의 재산과 권력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베드로의 수위권에 관한 가설들을 반박한다 1-7]
1. 가톨릭 교회에 복종하라는 요구
2.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3.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에 대한 이 지배권을 수립한 것이 아니다
4. 열쇠에 대한 왜곡된 권리 주장
5. 베드로가 받은 것은 영예였지 권력이 아니었다
6. 기초는 하나뿐이다
7. 사도들 사이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지위에 대한 성경의 기록
[교회 내의 단독 통치권은 그리스도께만 있다 8-10]
8.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9.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다
10. 인간 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베드로가 로마 감독이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영구적인 수위권을 가질 이유는 되지 않는다 11-13]
11.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로마가 그것을 주장할 수는 없다
12. 안디옥의 수위권을 옮겨 받았다는 주장
13. 다른 총감독들의 서열
[바울이 로마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베드로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14-15]
14.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대해서
15. 빈약하고 막연한 증거
[로마 교회에 대한 존경은 하나로 통합하는 머리였기 때문이 아니다 16-17]
16. 로마 교회가 가장 초기에 가졌던 중요성
17. 초대 교회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보편적 감독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초기의 로마 교구는 지위가 높지 않았다 1-4]
1. 니케아와 에베소의 회의에서 로마 교구가 가졌던 지위
2. 칼케돈과 제 5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3. 후대에 로마 감독들이 자칭한 높은 칭호는 초기에 없었다
4. 그레고리우스 1세는 보편적 감독이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황제 및 대감독들과의 관계에서 로마의 권위는 제한 되엇다 5-10]
5. 로마의 재판권의 시초
6. 당시의 로마가 가졌던 권한의 특색
7. 상호 충고
8. 회의 소집권
9. 위조 문서를 이용했다
10. 콘스탄티누스와 멜키아데스 감독과 아를 종교회의
[5, 6 세기 교황들의 태도: 로마 대 콘스탄티노플 11-16]
11. 위조와 횡령
12. 그레고리우스 1세 시대의 교황의 권력
13. 그레고리우스 재임 중에 교황직에 가한 제한
14.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수위권을 다투었다
15. 콘스탄티노플이 인정받는 것을 레오가 분개했다
16. 단식자 요한의 교만과 그레고리우스의 겸손
[찬탈자들이 포카스와 페핀과의 관계를 통해서 로마의 권한이 확립되었고 그 후에 확대되어 교회에 해를 끼쳤다 17-18]
17. 마침내 교황의 수위권이 확립되었다
18.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기대까지의 교회의 쇠퇴
[후대 교황들은 그레고리우스 1세와 베르나르두스이 원리에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 19-22]
19. 현대의 교황 제도와 그 권력 주장
20. 무모한 권력 주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위조 문서들
21. 지금 교황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레고리우스는 배척한다
22. 현재의 교황권의 부패상
[후기 교황권을 규탄한다 23-30]
23. 로마에는 교회나 감독직이 있는가
24. 배교
25. 적그리스도의 왕국
26. 교황권은 진정한 교회 질서에서 멀리 떠났다
27. 교황들의 악행과 이단설은 그들의 권력 주장과 전연 반대된다
28. 요한 22세의 배교
29. 교황들의 도덕적 방종
30. 추기경들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는 임으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교회의 권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한된다. 1-9]
신앙고백한 베드로에게 신실한 신앙을 가르쳐 들어오게 한 것은 열쇠: 땅에서 매면 하늘에 푼다[교회의 재판권]. 하늘의 권세를 교회에 주셨다. 출교를 주셨다. 권징과 신실한 권한을 주셨다. 이런 태두리 안에서의 교회 생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다. 참 교회 안에서 좋은 교회는 하나님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하게 되느냐의 차이다. 한국의 10대 교회 머리 수 많은 교회라고 인식하고 있다. 교회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얼마나 풍성하게 흘러나오는가가 좋고 나쁨이다.
1. 교리에 관한 교회의 권위: 그 임무와 한계
2. 교리에 관한 모세와 제사장들의 권위
3. 교리에 관한 예언자들의 권위
4. 교리에 과한 사도들의 권위
5. 계시의 단일성과 다양성
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적인 기초
7.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8.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칠 권한을 사도들은 받았다
9. 사도들도 말씀을 능가할 자유가 없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더욱 없었다
[말씀에 의거하지 않은 교리적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 10-16]
10. 가톨릭 교회의 주장
11. 교회 내에 그리스도가 계실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말씀에 매여 있다
12.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
13.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
14. 전승은 성경보다 낫다
15. 교회의 교리적 천명에는 모순이 있다
16. 반대자들이 드는 예는 빈약하다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교회 회의의 참된 권위 1-2]
1. 두 가지 서론적인 말
2. 교회 회의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목자들의 결점 때문에 회의들도 오류를 범한다 3-7]
3. 목자가 없어도 또 목자에 대항하면서도 진리는 교회 내에 자립 자존할 수 있다
4. 목자들의 변절은 예언되었다
5. 목자들을 잘 식별해야 한다
6. 회의들도 진리에 맞설 수 없다
7. 요한복음 11:47에 있는 예
[성경을 떠났기 때문에 회의들은 타락했고 니케아와 칼케돈 회의도 결함이 있었다 8-11]
8. 회의들의 결정은 얼마나 타당한가
9. 회의들이 서로 충돌했다
10. 회의들과 인간적 결함
11.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눈 먼 인도자에게 순종하지 말라 후대 회의들의 결정에도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과오가 많았다 12-14]
12. 맹종은 불가하다
13. 성경 해석을 위한 회의들의 실제적 의의는 무엇인가
14. 회의의 결정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는 그릇된 평가를 한다
제 10 장
입법권: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 교회법과 교회 전통 하나님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양심 1-4]
1. 근본 문제
2. 가톨릭의 교회법은 양심을 노예도 만든다
3. 양심의 본성
4. 양심의 속박과 자유
[사람들과 교황들이 정한 법에 대한 양심의 입장: 하나님만이 입법자이시다 5-8]
5. 사람들이 만든 법은 양심에 대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6. 교회는 양심을 속박하는 독립된 법을 정할 권리가 없다
7. 모든 자의적 지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침범이다
8. 인간이 만든 법 가운데서 용인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방법
[예배 의식을 제정한 교회법은 전제적이며 경박하며 성경에 배치된다 9-18]
9. 이미 말한 원칙에 따라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은 배격되어야 한다
10. 교황 제도의 교회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한다
11. 가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하며 무익하다
12. 그들의 신비는 기만이다
13. 가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한 집성에 의해서 유대교적 요소로 양심을 괴롭힌다
14. 의식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것이지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15. 부패한 의식들을 속죄의 제사라고 한다
16. 일반적인 통찰과 그 적용
17. 가톨릭의 교회법은 교회법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18. 가톨릭의 교회법은 사도들이나 사도적 전통에서 온 것이 아니다
[사도적이라고 사칭하는 무익한 의식들이 축척되었다: 약한 양심들에 대한 의무 19-22]
19. 사도 시대 이후에 축적된 무익한 의식
20. 어그스틴의 말을 해석한다
21. 사도행전 15:20에 있는 명령
22. 약한 형제들에 대한 의무
[예배에서 쓰는 유전과 인간의 조작을 성경과 그리스도 자신께서 배척하신다 23-26]
23. 교회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증거와 모순이 된다
24. 하나님은 패악한 예배를 미워하신다
25. 가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반증을 논박한다
26.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해 경고하셨다
[교회 정치와 예배를 바르게 정리하는 길: 예절과 사랑과 자유로운 양심 27-32]
27. 교회법의 필요성
28. 올바른 교회법의 문제
29. 예배에서의 진정한 예절: 허식을 피하라
30. 교회법에 의한 속박과 자유
31. 교회법과 관련된 속박과 자유의 문제
32. 준수해야 할 사항은 적어야 하고 또 덕을 세우는 것이라야 한다
제 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 제도에서의 그것을 남용
[ 재판권과 권징: 열쇠의 권한과 국가 행정 1-5]
1. 교회 재판권의 근거는 열쇠의 권한에 있다
2. 매고 푸는 권세
3. 국가의 재판권과 교회의 재판권
4. 교회와 그리스도인 관리
5. 교회 재판권의 영적 성격
[주교들의 부당한 권력에서 생긴 폐해들 6-10]
6. 고대 교회에서는 어느 개인이 법을 집해하지 않았다
7. 재판권과 권징의 타락
8. 주교들의 세속적 권력은 주교직의 의미와 모순된다
9. 주교들이 군주의 권세를 장악했다
10. 주교들이 어떻게 세속 권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교황들이 무모하고 부정직한 권력을 주장하며 세속적 권력을 찬탈했다. 11-16]
11. 교황이 세계의 수위권을 가지게 된 시초
12. 콘스탄티누스의 헌서는 어리석은 사기다
13. 헨리 4세와 힐데브란드
14.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저주받은 교회 재산 유용
15. 가톨릭 성직자들의 치외 법권
16. 감독들도 세속 재판에 복종했다
제 12 장
교회의 권징: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진정한 권징에서 열쇠의 권한은 어떤 것인가 권징의 목적과 절차 1-7]
1. 교회 권징의 필요성과 성경
2. 교회 권징의 단계
3. 숨은 죄와 나타난 죄
4. 경한 죄와 중한 죄
5. 권징의 목적
6. 권징은 경우에 따라 처리 방법이 다양하다
7. 고대 교회에서는 권징이 모든 위반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었다
[권징은 온전하게 실시하라: 엄격주의를 논박한다 8-13]
8. 교회 권징의 엄격주의와 온건주의
9. 교회 권징에 따르는 우리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10. 출교는 교정 수단이다
11. 교회 권징에 대한 완고한 과격주의를 배척한다
12. 혼란을 일으키는 엄격주의: 도나투스파와 재세례파
13. 어거스틴은 분별력이 있는 권징을 요구한다
[개인적 및 공적 금식의 가치와 목적: 준수해야 할 원칙들 14-18]
14. 죄를 공적으로 사로 고백한다
15. 금식의 목적
16. 금식과 기도
17. 금식과 회개
18. 금식의 성격
[미신 공로 사상 위선적인 금식 사순절 행사 등은 위험한 것이다 19-21]
19. 금식에 대한 오해
20. 교회사에서 금식은 타락했다
21. 금식 기간에 사악한 방종에 빠졌다
[성직자 독신 제도는 유해한 새 제도다 22-28]
22. 성직자들의 권징과 그 타락
23. 사제 독신제는 성겨에 배치된다
24. 결혼을 금하고 영적으로 해석했다
25. 여기에 반대하는 성경적 이론을 반박한다
26. 고대 교회와 독신주의
27. 독신주의의 후기 발전
28. 독신 제도 하의 폐해
제 13 장
맹세: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맹세의 본질: 맹세에 대한 일반적 오해 1-7]
1. 타락과 여러 가지 위험
2. 우리가 맹세하는 상대는 하나님이시다
3. 맹세하는 사람
4. 의도에 따라 맹세를 분류하다
5. 미래에 관한 맹세
6. 일반적으로 합당한 맹세에 대하여
7. 사악한 맹세
[수도사들의 맹세와 수도원 생활의 쇠퇴 8-10]
8. 고대 교회의 수도원 생활
9. 수도원 생활에 대한 어거스틴의 묘사
10. 수도원 생활의 초기와 후기를 비교한다
[수도원의 완전성을 말함은 잘못이다 11-14]
11. 수도원 생활은 상태가 완전한가
12.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생활 법칙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
13. 마태복음 19:21의 의미
14. 수도원들의 분파주의
[고대의 주장과 수도원의 주장은 서로 다르다: 신약성경에 있는 과부와 여집사는 수녀가 아니었다 15-19]
15. 수도사들의 행실이 타락했다
16. 고대 수도원 생활에 대한 의문
17. 수도사들의 맹세 특히 독신 생활에 대한 맹세
18. 디모데전서 5:12에 있는 과부들의 경우
19. 수녀들은 매우 다르다
[불법적이고 미신적인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 20-21]
20. 허용할 수 없는 맹세는 지켜야 하는가
21. 수도원 맹세를 파기하는 문제
제 14 장 : 칼빈이 생각한 표지가 말씀과 성례이기에 중요하다.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이것 때문에 갈라졌다. 핵심이다. 이것은 주님이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세례를 주라 성찬을 기념하라
성례
[성례란 말의 뜻: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 1-6]
1.정의
우리의 믿음을 돕는 또 하나님의 수단은 성례이며 이것은 복음 선포와 관련되었다...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서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표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은: 말씀과 성례 은혜를 담아주시는 그릇[방편]이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례말고도 말씀이 은혜의 방편이다. 관련성이 있는데 둘 다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교회에 주시는 성장할 수 있는 것인데 말씀이 지향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성례의 목표도 그리스도다. 말씀 성례가 그리스도가 아는 것만큼 은혜를 체험한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두 수단이 말씀과 성례이다.
차이점: 말씀은 독립적 성례는 말씀과 성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성례의 의미 지향하는 바를 시행해야 한다. 말씀 없이는 안 된다. 성례는 반드시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2. 성례라는 말
3. 말씀과 표징
그런데 내가 제시한 정의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례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말씀의]부록과 같다. 그 목적은 그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우리에게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하며 이를테면 비준하는 것이다.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다음에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 부동하며 자체이외에서 더 훌륭한 학인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각 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괴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려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세례가 연합하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 이것을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가시적인 외형적인 그림이 세례의식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보고를 파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사는 사람이다. 이 말씀을 더욱 교제하도록 하는데 더 확실하게 유지하게 한다. 이것인 성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약한 믿음이 성례를 통하여 강해진다. 더 생생하게 해준다. 연합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먹고 산다. 말씀도 은혜가 되지만 성례는 늘 새롭게 된다.
4.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한다.
5. 인장과 같은 성례
공무서는 쓰는데 빈 백지에 도장을 찍으면 소용이 없다. 내용이 있고 도장이 있으면 권위가 주어진다. 공문서 위에 도장을 찍는다. 성례는 인쳐주는 효과이다. 그래서 보이는 말씀이다. 설교는 들리는 말씀이다.
6. 언약의 표징인 성례
[성례는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며 오직 말씀과 협력함으로써만이 믿음을 굳게 만든다: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독특한 표지이다 7-13]
7.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이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8. 성례에 의해서 믿음이 굳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는가
첫째,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둘째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끝으로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말씀과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앞에 나타날 뿐이며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말씀과 성례의 효력은 역시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말씀에 역사하시는 성령이듯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먼 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막힌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
성례식에 참여한다고 은혜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은 성례 자체가 은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칼빈은 성령을 많이 높인다. 칼빈은 성령님의 신학자이시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무도 아니다,.
10. 사람이 설득될 때와 같다
듣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깨닫고 원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성령께서 열어주셔야 성례의 주신 은혜를 알아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을 알게 하소서 성례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해 달라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믿음의 발생은 성령님,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는 방편이 말씀과 성례이다.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13. 사크라멘툼이라는 말
[성령 자체는 은혜를 주슨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14-17]
14.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15.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믿음은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성례도 그리스도 왜?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성찬은 이미 연합되어 교제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모든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나는 주장한다.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견고성을 지니면 그를 떠나서는 성례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성례에 임하는 사람들이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례에 임하기 전에 성령이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스코틀랜드 성례식을 하나가 부흥이 온다. 성례식을 할 때에 눈으로 보는 역사가 있기 때문 이다.
17. 성례의 진정한 임무
[성경에 있는 사건들이 널리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과 교회의 보통 성례에 국한시키는 것 18-20]
18. 광의의 성례
말씀+증표[무지개 할례]=은혜 지속적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해야 한다. 결혼+반지=사랑
기드온에게 약한 양털이 광의의 성례이다.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의도하는 것은 주께서 그의 교회에서 항상 행하라고 하신 성례들을 논하는 것이다..
20. 구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약속했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다: 구약의 성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현현을 예시한다 21-26]
21. 할례와 결례와 희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2.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성례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23. 옛 성례와 새 성례의 유사점과 차이점
24. 할례의 가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25. 신약성경은 왜 유대인들의 의식들을 경시하는가
26. 유사점과 차이점: 어거스틴의 구별
구약의 광의의 의미와 성례와 신약의 성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증거하는 점에서는 양쪽이 다 같다. 그러나 우리의 성례는 더 분명하고 더 빛나는 증거를 한다. 양쪽이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 우리 것은[신약] 더욱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 주며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논한 신구약간의 차이가 부합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치심을 같으나 구약은 희미 신약은 밝게
성례는 은혜의 방편 믿음을 가지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빛이 충만해야 한다.
제 15 장
세례
[세례는 우리가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가한다는 표징이다 1-6]
1. 세례의 의미
그리스도와의 연합: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구체적으로는 사죄 칭의 화친...
물 속은: 죄를 씻어 줌+그리스도와 연합
세례를 안 주어도 연합: 세례를 받음으로 찡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감동이 없다. 충분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연합의 상징, 예수님과 결혼식이다. 세례받은 날을 기억해야 한다. 진중 세례, 진정 믿음이 없으면 100번을 받아도 연합이 되지 않는다. 말씀 성례 믿음이 따라야 한다. 세례받기 이전에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쉬운 것이 아니라.
2. 세례의 효력은 말씀없이 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3. 일평생 깨끗함을 받는다는 표
4. 세례와 회개의 관계
5.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는 표이다
6.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표이다
세례는 우리 눈으로 볼 때는 지역 교회에 가입이 된다. 영적 회원이 된다. 우리가 우리 신앙을 고백한다. 내 신앙을 고백한다. 2차적인 것이다.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는 다르지 않다: 그 뜻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다 7-9]
7.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
8. 세례는 같으나 사람이 다르다
9. 구약에 있는 세례의 원형
[우리는 세례식에 의해서 원죄로부터 풀려 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0-13]
10. 세례와 원조와 새로운 의
11.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2. 바울의 내적 투쟁: 로마서 7장
13. 세례는 고백의 표
[세례는 그 상징된 약속을 믿고 받아야 하며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14-18]
14. 표징과 실상
15.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세례
16. 세례는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
17. 회개가 늦어도 세례는 유효하다
18. 바울은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다
[필요 이상의 의식과 여성에 의한 세례에 반대한다 19-22]
19. 그릇된 세례식과 바른 세례식
20. 비상한 세례에 반대한다
21. 여성들이 세례를 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22.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여성에 의한 세례의 선례가 되지 않는다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 1-6]
1. 유아세례에 대한 공격
2. 세례의 의미를 결정한다
3. 세례와 할례
4. 차이는 외적인 것에 있다
5.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
6. 차이는 확인의 방법에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불러 축복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세례의 표징과 은혜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7-9]
7. 예수님과 어린이들
8.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의 침묵
[세례와 할례를 관련시키지 말라는 재세례파의 이론에 대답한다 10-16]
9.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10. 차이 아닌 차이를 말한다
11.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다
12. 신체적 및 영적 유아들
13.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
14. 유대인들과의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
15. 약속은 비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16. 세례와 할례의 다른 차이점들
[유아들은 믿을 능력이 없다는 이론에 대하여 답변한다 17-20]
17.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18. 그리스도의 유아기를 보아서
19.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대론
20.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는 반대론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 안에서 성령께서는 역사하셨다 21-22]
21. 어린이는 자라서 세례 받은 뜻을 깨닫는다
22. 세례는 어린이에게 위로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
[ 초대 교회의 유아세례 23-24]
23. 어른들에 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지 말라
24.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른과 유아의 차이를 대표한다
[유아세례를 반대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구절들을 해석한다: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라고 해서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25-30]
2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26.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27. 세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28. 마가복음 16:16에는 유아들에게 대한 말씀이 없다
29. 예수님은 성인 성례의 원형이시다
30. 세례와 성만찬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대한 대답과 결론 31-32]
31. 세르베투스의 여러 가지 항의
32.우리의 어린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제 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것이 우리에게 주슨 유익
[주의 만찬은 떡과 포도주를 표징으로 삼아 영적 양식을 제공한다 1-3]
우리는 밥 먹고 살듯이 예수님은 우리 영적 양식이다. 모든 은혜를 받아 산다.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 한 번 연합이 되면 영원 성찬은 날마다 좋기 때문에 횟수는 정해지지 않으나 자주 해야 한다. 성찬의 지향;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 성찬식: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확인하고 누리며 떡이 하나의 떡으로 나누어진 것이기 때문에-우리 함께 함께 성도들도 하나라는 진리이다.
쯔빙글린 |
루터파 |
칼빈 파 |
가톨릭 |
떡은 떡 예수님은 하늘에 기념 |
떡은 떡대로 예수님이 오심 |
예수님의 몸은 하늘 보좌 우편 영적으로 임재 |
떡이 예수님의 몸이 된다 |
잘못된 가톨릭의 미사를 잘못
1. 표징과 본체
2. 성찬의 특별한 결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3.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때에 성찬으로 말미암아 보장된 약속: 이것은 설명하기보다는 느끼는 신비이다 4-7]
4. 성만찬이 주는 약속의 의미
5. 믿음으로 먹는다는 뜻
6. 이 일에 대한 어그스틴과 크리소스톰의 생각
7. 생각과 말로 다 묘사할 수 없다
[생명을 주는 이 교제는 성령께서 실현시키신다 8-10]
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9.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을 준다는 뜻
10.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
[외형적 표징과 보이지 않는 실재와의 관계를 스콜라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잘못 표현했다: 화체설도 하나의 예다 11-15]
11. 성례의 의미와 본체와 효과
12. 그리스도의 몸은 공간적으로 임재하는가
13. 스콜라 학자들의 오류: 떡을 하나님으로 오인한다
14. 화체설
15. 화체설의 근거와 이론
[몸의 편재설을 편협한 문자적 해설이라고 반대하는 이유: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영적 친교에 관한 견해를 설명한다 16-31]
16. 반대론
17.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육체적 존재를 부인한다
18.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들어올릴 때에 임재를 인식한다
19.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다
20. 말씀으로 제정하심
21. 확고한 말씀의 비유적 해석
22. 이다라는 말
23. 순전한 문자적 해석은 불가능하다
24. 우리의 해석은 이성에 지배되었다고 하는 비난에 대답한다
25. 말씀은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26.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다
27. 위에서 말한 올라간다는 뜻
28. 어그스틴의 증언
29.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성
30.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배척한다
31. 그리스도를 우리에게고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로 들어올리우는 것이다
[신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참가하는 신체적 임재의 참된 성격 32-34]
32. 이 신비에 대한 복잡한 해석들을 배척한다
33.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따라서 실제적으로 참여한다: 불신자가 성찬에 참가하는 문제
34. 불신자의 성찬 참가에 대한 어그스틴의 생각
[물질에 대한 미신적 숭배를 배척한다 35-37]
35. 물질 숭배를 배척한다
36. 이런 숭배는 미신이며 우상이다
37. 성별된 떡으로 행하는 미신적인 의식들
[특히 중요한 점들: 상호간의 사랑 설교의 동반 병든 영혼의 약 합당하게 먹음 합당한 형식과 빈번한 집행 38-46]
38. 성찬에는 서로 사랑하는 뜻이 내포되었다
39.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
40. 성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한다는 뜻
41. 누가 합당한가
42. 믿음과 사랑은 필수 조건이지만 완전성은 그렇지 않다
43. 성만찬의 합당한 집행
44. 성찬은 자주 집행하라
45. 참여할 의무에 대한 어그스틴과 크리소스톰의 견해
46. 일년 일회의 성찬 참여에 반대한다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47-50]
47. 한 가지만 행하는 성찬을 논박한다
48. 사도들은 다만 희생을 드리는 자로서 잔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은 거짓이다
49. 후대까지 평신도도 잔을 받았다
50.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잔을 줄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제 18 장
가톨릭교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말살하는 모독 행위다
[미사는 모독적이며 성만찬을 말살한다 1-7]
1. 로마 교회의 교리
2. 미사는 그리스도의 대한 모독
3. 미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은폐한다
4. 말라기 1:11에 의한 주장
5.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6.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오는 유익을 우리에게서 빼앗는다
7. 미사는 성만찬을 폐기한다
[초기의 관습과 오해의 발생 8-11]
8. 사적 미사는 친교의 부정
9.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 교회에도 없었다
10. 교부들은 미사를 제사라고 보았는가
11. 교부들이 하나님의 제정 정신에서 이탈했다
[성만찬에 있는 제물 관념: 제물이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 미사는 신성 모독이다 12-18]
12. 구약의 예물과 주의 만찬
13. 희생의 성격
14. 미사를 판매한다
15. 유사한 가장과 망사에 대한 플라톤의 발언
16. 그리스도의 교회의 감사 제물
17. 찬양의 제물을 설명하는 성경 말씀
18. 미사는 더렵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17장과 18장에 대한 결론: 기독교의 성례는 둘뿐이다 19-20]
19. 세례와 주의 만찬만이 성례이다
20. 성례를 첨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제 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소위 다섯 가지 성사(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하지 않았고 초대 교회에는 없었다 1-3]
1. 성사라는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2.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절하실 수 있다
3. 성례가 일곱 가지란 것은 고대 교회가 몰랐다
[견진례는 성사가 아니다: 교육한 후에 받아들이던 고대의 관습을 회복하라 4-13]
4. 고대 교회의 관습
5. 로마 가톨릭교가 가르치는 완성된 견진례의 의미
6. 사도들의 안수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7. 기름을 바르는 것은 가짜 성사다
8. 견진례는 세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9. 구원을 위해서 견진례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어리석은 이야기다
10. 가톨릭 교회는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요시한다
11.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시하는 이유는 경박하다
12. 고대 교회의 관습은 견진례를 지지하지 않는다
13. 진정한 견진
[고해도 성사의 정의에 맞지 않는다 14-17]
14. 고대 교회 내의 참회
15. 고해는 성례가 아니다
16. 왜 사면을 성사라고 하지 않는가
17. 세례는 회개의 성사이다
[종부 성사는 야고보서 5:14-15를 오해한 것이며 성례가 아니다 18-21]
18. 종부 성사에 관한 성경의 말씀이란 것을 거부한다
19. 종부 성사는 성례가 아니다
20. 도유에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약속이 없다
21. 가톨릭 교회는 야고보가 제장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
[소위 신품 성사는 성직의 7계급 때문에 복잡하게 되었다: 신품 예식과 그 기능을 비평한다 22-33]
22. 한 성사인가 또는 일곱 성사인가
23.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직분을 다 가지셨을 것이다
24. 낮은 계급은 직책을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
25. 성별의식 특히 삭발례
26. 나실인들과 바울을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27. 삭발에 대한 역사적 해석
28. 사제와 장로
29. 사제의 임명식
30.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제사장직을 폐지한다
31. 도유는 쇠퇴한 의식들에 속한다
32. 부제
33. 차부제
[에베소서 5:28과 기타 구절들을 오해한 데서 혼인 성사라는 그릇된 주장이 생겼다: 결혼에 관련된 폐해 34-37]
34. 결혼은 성사가 아니다
35. 그들은 에베소서 5:28을 잘못 적용한다
36. 비밀이란 말의 번역과 그들의 혼인 경시에서 혼란이 생겼다
37. 가톨릭 교회의 교리의 결과는 폭압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게 하심=구원이다. 성례는 보이도록!
제 20 장
개혁주의자의 정치관 국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기관이다 소중하다.
국가 통치
[국가 통치와 영적 통치의 관계 1-2]
1.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의 차이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릴 때 교회와 국가로 사용한다.
우리는 사람이 이중의 통치 하에 있다는 것을 확립했고[그리스도인의 자유] 영혼 즉 사람에 대한 그리고 영생에 관계된 통치에 대해서는 다른 데서 자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둘째 통치 즉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외적인 도덕성만을 확립하는 통치에 대해서 논하겠다.
이것을 잘못된 국가관 재침례파에 대한 변론이다. 우리는 이중 통치를 받는 이중 국가자이다.
2. 두 가지 통치는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국가 통치의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를 사회 생활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 정의와 일치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며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것이다.
비기독교 국가는 예배는 하지 못한다. 공산국가는 정칮적 안정을 취하게 한다.
[국가 통치는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3-7]
3. 정부의 주요 임무
정부의 실지 운영에 대해서는 더 적당한 다른 곳에서 말하겠다. 여기서는 정부를 폐지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라는 것만을 알리고자 한다.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참으로 그 위치는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것들이 하는 일 즉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훼방 그리고 그 밖의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방해가 사회에 발생하거나 만연하지 않도록 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며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에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한다, 내가 위에서는 종교를 바로잡는 임무를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법위 밖에 두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일을 정부 정부에 맡긴다고 해서 아무도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3가지 조직: 주권 통치자+법+ 국민
법은 율법에서 나옴[안 믿는 자는 양심의 법, 자연 법을 주셔서 거기에 맞는 법=이방 법]
통치자 [4-8]
한 나라를 세운 통치자는 하나님이 세워셨기에 부인 배척해서는 안 된다.
4. 집권자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5. 그리스도인들이 집권자들을 부인 또는 배척함은 불가하다
6.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선을 장려 악을 억제해야하는 집권자들
7. 집권자의 강제력은 그의 지위를 인정받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정부의 형태들과 집권자들의 임무: 전쟁과 과세의 문제 8-13]
8. 각종 정부 형태
어떤 형태의 정부가 가장 좋을까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익한 소일거리일 것이다. 또 이 문제는 단순하게 해결될 수 없고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 토의의 성격은 크게 환경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계없이 정부 형태를 서로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제일 유용한지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같은 조건으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왕국이 전제국으로 타락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의 정치가 소수인 당파로 타락하는 것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민중의 지배가 난동으로 타락하는 것은 가장 쉽다. 철학자들이 논하는 정부의 세 형태에 대해서 그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나는 귀족 정치가 또는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를 결합한 제도가 다른 형태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자유를 적절한 절제로써 조절하고 견고하 기초 위에 바르게 확립하는 정치 제도가 가장 좋다고 인정하며 이런 형태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9. 율법의 두 돌판에 대한 고려
도덕 시민 재판법으로 나누는데 도덕법은 이스라엘에게는10계명 이방인들은 율법의 두 돌판을 지향함 공동체 전체가 사랑과 공의로 지배하게 한다. 가장 공의와 정의와 사랑이 시행하도록 한다. 한 나라의 법은 도덕법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에 섭리한다. 미친 사람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국가의 위정자를 하나님의 세운다.
10. 집권자들의 강제력 행사는 경건과 양립한다
11. 정부의 전쟁 수행권
국민들의 인권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통치자가 하는 일이다.
12. 전쟁에서의 자체와 인도적 정신
13. 정부의 과세권에 대하여
[공법과 재판 절차와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관련 14-21]
14. 구약성경의 율법과 각국의 법
도덕법과 각 세계의 법은 연결되어 있다. 일반 나라는 자연법을 이것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다. 법률 생활을 할 수 있다.
15.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과 재판에 관한 율법을 구별한다
16. 법의 단일성가 다양성
17. 그리스도인은 법정을 이용해도 좋으나 증오심과 복수심은 품지 말아야 한다
18. 그리스도인이 소송하는 동기
고전의 문맥이 아니라, 법 질서 소송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자기들이 정한 집단의 법을 우선으로 해서는 안 된다.
19. 법적 절차를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
20. 그리스도인은 모욕을 참으나 친절과 공평한 마음으로 공공 이익을 수호한다
21. 바울은 소송을 좋아하는 성품은 배척하지만 소송은 배척하지 않는다
[불의한 통치자도 공경하며 순종하라 22-29]
22. 공경
23. 복종
국민들은 불복종 권한이 없다. 국가 공무원은 할 수 있다. 존 낙스 등이 확대한다. 국민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잘못된 통치자가 나왔을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문제
24.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하라
25. 악한 지배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이다
26. 성경은 악한 왕에게도 복종하라고 요구한다
27. 예레미야 27장에 있는 느부갓네살의 경우
28. 왕 개인을 존엄하다고 하는 성경의 증거
29.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국민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헌법상의 관리들은 왕들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 우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30-32]
30. 하나님은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서 개입하시는 때가 있다
31. 국민의 자유를 보호할 헙법상의 의무가 있는 사람들
32. 인간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1) 스토아 학파 애피큐로스 플라톤 등을 이용 오늘날 조류를 이해해야 한다.
2)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기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예수님에게 올 수 없다. 죄인의 죄의 비참함과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의 기쁨은 비려한다.
4) 이런 우리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된다. 고양이가 본성상 쥐를 죽이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다.
5) 자유로운 것 없다의 반응: 자기 만족과 게으름 구원과 자기는 관계 없음,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음: 조그만 것으로 노력, 자기에게 영광을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이 된다.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6) 이스라엘의 멸망시키려는 시도부터 지금까지
7)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되는가?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연합되는 것은 우리편에서는 우리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연합의 띠다. 성령님은 신앙을 주시는 분이다. 믿음 자체를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는 성령님이시다.
8) 양자의 영 불 기름: 우리와 그리스도와 연합의 유익한 점을
표현
9) 사울왕은 성령이 임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임함을 일반적인 성령의 은혜로 보면 되지 않는가!